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요한복음 12장 41-50절)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그러나 관리 중에도 그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 때문에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교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예수께서 외쳐 이르시되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그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내가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하리라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니라 하시니라
이사야 53장의 고난 받는 종의 모습을 인용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우아하고 장엄하고 화려한 왕의 모습이 아니라 초라하고 부족한 모습의 왕, 그러나 인류를 위해 친히 낮아지신 고귀한 사랑을 그려낸다. 이사야를 통해 주신 말씀은 신약에서 성취된 것이다. 요한복음 1장 11-13절이다.『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예수님의 가르침은 유대인들에게 달가울리가 없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기대와 본성과는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힘이 없다. 유대 관리 중 믿음을 지닌 사람들이 꽤 있었다고 기록한다. 그런데 그들은 공동체에서 쫓겨날까 두려워했다.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의 영광, 그들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중요하게 여겼다. 즉, 자신들의 집을 견고하게 만들기 위해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시류를 선택한 것이다.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그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예수님은 유대 관리들의 유약한 믿음을 비난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분의 목적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사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인을 향한 적개심을 품은 폭도였다. 구원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지만, 주님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셨다.
복음은 에덴동산에서 죄를 범한 아담과 하와를 회개하게 하시고, 가죽옷을 입히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다. 말 구유에 찾아와 인류의 영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니라 하시니라』복음은 창세 전부터 에덴동산에서 구약시대를 거쳐 신약과 교회와 지금에 이르기까지 단 한 번도 달라지지 않았다. 회개하고 하나님 나라로 돌아오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보내신 자, 곧 하나님의 아들의 말을 믿으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마시고 살을 먹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곧 십자가에서 죽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자는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다.
죄인들은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죄인들에게 지키라고 준 것이 율법이다. 회개하고 돌아오라고 말씀하시는데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여 법을 주시므로, 그 법을 지키려고 애쓰다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돌아오게 하시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죄인들은 그 율법을 잘 지키면 의인이 되는 줄로 생각했다. 의인이 되는 길은 법의 조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법을 통해서 죄를 깨달아라는 말씀이다. 법을 바라보는 자는 먼저 자신을 바라보고 회개할 때 법을 어기지 않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죄의 결과를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짓기 전에 자신을 깨닫는 것이 회개의 시작이다. 회개의 시작은 선한 양심이 샘물처럼 솟는 것이다. 선한 양심은 어디서 왔는가? 회개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것이다.
베드로전서 3장 21절에서『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하늘로부터 오는 선한 양심은 옛 것이 죽어야만 한다. 세례는 옛사람이 죽는 것이다. 세례는 죄를 씻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나타낸다. 자기부인의 의미도 모른채 세례로 예수의 피로 모든 죄가 씻어졌다고 말한다. 이게 거짓복음이다. 예수와 함께 죽기 전에는 예수의 피로 씻어지지 않는다. 유월절 규례는 예수님의 피를 적용하기 전에 예수님의 죽으심, 즉 죽은 어린양의 고기가 적용된다.
어린양의 고기는『아침까지 남겨 두지 말고 아침까지 남은 것은 곧 소화하라』(출12:10), 그 희생의 고기가 제 삼일까지 남았으면 불사를찌니 (레7:17), 성찬은 잔을 마시기 전에 함께 떡을 나누는 것이다. 유월절 어린양을 잡는 것은 어린양을 죽이는 것이다. 그 다음에 그 피가 적용된다.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른다. 어린양이 완전히 죽기 전에는 피를 바르지 못한다. 예수님의 죽으신 삼일의 기간에 우리도 죽는 것이다. 그래야 그리스도께 속한 자가 된다. 죄의 노예를 사는 것이다. 죄의 노예인 것을 깨닫고, 자기도 십자가에서 죽는 자만 예수님이 사시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께 대하여 회개요, 주님은 우리를 사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죽은 자들은 죄를 미워하고 죄를 짓지 않게 된다. 우리 죄에 대하여 하나님이 느끼시는 것은 바로 그의 아들을 통한 극한 고통이셨다. 그만큼 하나님은 죄에 대하여 분노하고 계신다. 죄가 죽어야만 하는 이유다. 로마서 6장 2절에서『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그런데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칭하면서도 죄와 타협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은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아니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마음과 같이 느껴지고 깨닫는 자만이 하늘로부터 믿음이 오게된다. 이것은『내가 예수믿겠다』고 결정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갈라디아서 3장 22절에서『그러나 성경이 모든 자를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이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이 문장의 주어는『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이다.『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다. 오늘날은『나의 믿음』을 강조한다. 그러나 나를 부인하면, 예수의 믿음이 약속으로 주어진다. 나는 죄인이므로 믿음을 가질 수 없는 존재다. 그래서 나를 부인하고 예수의 믿음 속으로 들어가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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