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보라 너희가 다 제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요한복음 16장 30-33절)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 부터 나오심을 우리가 믿사옵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보라 너희가 다 제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우리가 교회 생활을 아무리 오래해도, 회개를 했는지 안 했는지 살펴보아야만 한다. 회개는 내가 죽어야 할 옛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옛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이다. 하와와 아담은 선악과를 먹은 다음에 그들의 행동은 하나님께 스스로 나갈 수 없었다. 그래서 에덴동산 숲에 숨어있었다. 이와 같이 사람이 하나님께 죄를 지었을 때는 스스로 하나님께 나갈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죄는 하나님을 떠나고자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뱀의 마음인 것이다. 각자 개인이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탐욕인 것이다. 이 탐욕이 죽지 않는한 하나님께 나갈 수 없다. 탐욕이 죽지 않으면서, 하나님께 나갔다고 믿으면 그것은 그냥 자기 생각일 뿐이다.
죄인은 하나님께 나갈 수 없다. 예수님의 모든 비유는 하나님이 혼인 잔치에 사람을 초청해도 인간은 아무도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빈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 돌아가면 하나님이 받아주실 것이라는 말이 있지만, 죄인들은 죄를 고백하고 반성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오늘날 하나님을 찾고 예배하고 죄를 고백하고 해도, 우리 스스로는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는 길은 주님께 달려있다.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 죄인이 죽은 자같이 되어 돌아가는 것이다. 영접기도는 먼저 인간이 죄를 깨닫고 죄를 고백하고 영접하면, 하나님이 기다렸다는듯이『그래 내가 그 말 할 때까지 내가 움직일 수 없었어』라고 생각한다면 미혹이다.
요한복음 16장 30-32절의 말씀은 예수님이 체포되기 직전에 하신 말씀이다. 제자들은 요한복음 13장의 긴 설교를 들은 후에『이로써 하나님께로 부터 나오심을 우리가 믿사옵나이다』라고 고백했다. 그런데 예수님은『너희가 다 제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라고 말씀했다. 그런데 이 말을 제자들은 아무도 받아드리지 않았다.
요한복음 13장의 설교는『너희들은 조금 지나면 내가 가는 곳에 지금은 올 수 없다. 그러나 조금 더 지나고 나면 올 수 있다』고 말씀했다. 베드로는『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버리지 않습니다』라고 강하게 항변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다닌 것을 후회한 적이 없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기적과 능력을 볼수록 주님의 나라가 더 가까이 왔다고 생각했다. 주님이 왕이 될 때 제자들은『누가 좌편, 우편에 앉느냐』『누가 크냐』 라고 다투었다. 이 싸움의 배경도 예수를 왕으로 믿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기억 못한 것이 가끔 말씀하신『내가 온 것은 죄인의 대속물로 죽으로 왔다』고 하는 말이었다.
그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을 보면서『예수님은 사랑』이라고 생각했다.『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인도 살려주셨지』 라고 생각했다. 문둥병자도 고쳐주셨고, 그래서『예수님은 사랑』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들이 경험한 예수님의 모습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너희들은 죄인이야』라고 설교를 별로 안했다.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기적을 일으켜 주시면서 풍랑을 가라앉히시면서,『너희들은 죽을 죄인들이야』라고 말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예수님의 죽음이 가까이 오자, 『내가 마지막으로 너희들과 떡과 잔을 나누고 싶다』고 하셨다.
유월절 행사였다.『이 떡은 내가 너희를 위하여 죽는 내 몸이야,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야』라고 하면서 떡을 먹고, 잔을 마셨다. 그런데 삼년간 전혀 들어보지 못한 말씀을 하신 것이다.『오늘밤 너희들은 다 나를 버리리라』제자들은 이 말씀을 받아드릴 수 없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과 그리스도 구원자라는 것을 의심한 적이 없이 믿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이전에는 예수를 믿을 수는 있어도, 회개할 수는 없었다. 회개는 바로 십자가로 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십자가 앞에 우리 스스로는 나갈 수 없다는 것이다.『오늘밤 다 나를 버리리라』라고 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늘밤 구원을 다 완성하신다는 것이다. 하늘의 빛이 비춰져야지만 우리의 모습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지적으로 이해되지만, 이 말씀을 통해 나 자신이 발견되기 위해서는 하늘의 빛이 비춰져야만 한다. 베드로는 세번 부인하며서도 몰랐다. 예수님께 죄를 지어도 우리가 모른다. 베드로가 세번째 부인하는 순간, 예수님과 베드로의 눈빛이 마주쳤다. 예수님이 먼저 쳐다 보고 있었다. 고문 당했던 예수님이 얼굴을 돌이켜서 베드로를 보는 순간, 베드로는『나는 예수를 모른다니까』라고 말하고 있었다. 베드로는 돌이킬 수 없는 순간이었다.
회개는 하나님의 빛이 우리에게 비춰주실 때 깨닫게 되고 회개하는 것이다. 회개하는 자는 내가 하나님을 떠난 자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 대하여 죽어야 할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때가 있다. 오직 깨닫고 부르짖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다. 그 때가 하나님의 주권이며, 주권적인 은혜이시다. 인간들을 회개하게 하시는 은혜는 거듭나게 하는 은혜와 같다. 결국 죄 사함을 받게하는 은혜와 같은 것이다. 성령을 주시는 은혜와 같은 것이다. 이 네 가지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이시다. 인간이 먼저 시작한 은혜가 아니라 주님이 먼저 시작한 은혜다. 그래서 주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회개인 것이다.
율법가운데 있는 사람은 주님이 요구하시는 것이 열정인 줄로 생각한다. 열심히 노력하고 충성 봉사하면 주님의 은혜가 더 한 줄로 생각한다. 이것은 사단의 속삭임이다. 회개하기 전, 사람의 생각이 이런 것이다. 죄를 사랑하는 순간이 있고, 뜨는 해가 지는 때가 있듯이 죄를 후회하는 순간도 있다. 그리고 죄를 미워할 때도 온다. 죄를 사랑하거나 죄를 미워할 때도 우리 스스로는 에덴동산 숲에서 나올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기 전에는 회개할 수 없는 것이다. 회개는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원하시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것이 주권적인 은혜다. 회개는 죄의 고백을 넘어서, 죄에 대해서 죽는 것이다. 죄에 대하여 십자가에서 죽기 전에는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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