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요한복음 19장 17-19절) 그들이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브리 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가시니 그들이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새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 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예수께서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 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
빌라도는 예수의 죄목을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썼고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은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쓸 것을 요구했다. 로마 황제가 지목한 왕 외에는 왕이 될 수 없었고 황제가 예수를 왕으로 임명한 적이 없었으니 유대인의 왕 예수는 반역자였다. 법적 논리가 그러했다. 그러나 예수의 십자가가 누명이라면, 음모라면, 정치적 술수라면 그 십자가에 걸쳐 있는 죄는 예수의 것이 아니다. 그 죄는 누명을 씌운 자, 음모를 꾸민 자, 정치적 술수를 쓴 자의 것이 되어야 마땅하다. 십자가의 가로대를 짊어져야 하는 자는 바로 그 죄를 진 자들이어야 한다. 내가 짊어져야 할 가로대를 남에게 지우는 것은 자기 죄를 쌓아올리는 것과 같다.
예수의 눈길이 머문 곳은 이리 같은 군인도, 늑대 같은 대제사장도 아니었다. 남의 죄를 자기 것처럼 짊어진 예수는 죽음의 자리에서 어머니를 향해 눈길을 둔다.『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그리고 사랑하는 제자에게 눈길을 돌렸다.『보라 네 어머니라』타인의 죄를 자기 것처럼 짊어진 예수의 눈길이 머문 곳은 어머니와 제자였다. 예수께서 죽음의 자리에서 눈에 담은 것은 그들을 향한 사랑이었다. 예수님의 사랑은 십자가의 죽음이다. 그 죽음은 하나님의 진노에 의해 모든 인류를 대속하는 죽음이었다.
그 죽음이 없었다면, 모든 인류는 구원받을 길이 없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진노만 있을 뿐이다.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을 떠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간들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동시에 보여주신다. 하나님의 공의를 생각하지 않고 사랑만 생각한다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절반 밖에 모르는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를 깨닫는다면,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합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 말씀을 응하게 하시는 분이셨다.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시편 69편 21절인 『그들이 쓸개를 나의 음식물로 주며 목마를 때에는 초를 마시게 하였사오니』라는 말씀을 이루시려는 것이었다.
신 포도주는 식초와 같다. 목이 마를 때 물이나 포도주가 아닌 식초를 마신다는 것은 오히려 더 고통스럽기에 차라리 마시지 않는 것이 낫다. 비록 사람들이 예수님을 놀리기 위해 식초인 신 포도주를 주었지만 예수님은 성경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식초인 신 포도주를 받으시고 『다 이루었다』는 말씀을 하시며 돌아가셨다. 『다 이루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창세 전에 계획하신 일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서 범죄한 영들이 첫사람 아담으로부터 세상으로 내려가고, 마지막 아담으로부터 하나님 나라로 돌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자는 하나님 나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리스도 안이 방주 안이다.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려면 육의 몸을 벗고, 영의 몸(그리스도의 옷)을 입어야만 한다.
또한 예수님의 시신은 십자가에 달린 두 죄수와는 달리 그 다리가 꺾이지 아니하셨고 창으로 옆구리가 찔리셨는데 이것 역시『이 일이 일어난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또 다른 성경에 그들이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는 말씀처럼 구약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처럼 구약 성경에 기록된 말씀들이 그대로 다 이루어지는 통로가 된 사람들은 다름 아닌 예수님을 믿지 않고 희롱했던 유대인들과 빌라도와 로마 군인들이었다.
예수님을 조롱하고 희롱하던 유대인들과 로마 군인들과 빌라도는 그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성경 말씀을 이루어지게 하는 통로로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믿음의 사람들도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통로로 사용되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과연 어떤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어지게 하는 통로로 사용되느냐는 점이다. 예수님을 신 포도주로 희롱하고 창으로 찌르는 비참한 상황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이루어가는 통로가 된 유대인들이나 로마 군인들이 아닌, 아름답고 진실하며 소망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어가는 통로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또한 말씀 속에는 예수님의 장례를 귀하게 치루는 통로로 사용된 두 사람이 나온다. 그들은 공회 의원이었던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였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당돌히 빌라도에게 찾아간 것은 요셉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임을 이제는 더 이상 숨기지 않고 세상에 드러내는 행동이었다. 이것은 요셉이 공회 의원으로서 그동안 쌓아왔던 모든 것을 한 순간에 잃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살아계셨을 때에는 자기의 모든 지위를 잃을까봐 유대인들이 두려워서,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드러내지 않았던 요셉이 막상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에는, 왜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라는 사실을 드러낸 것인가? 그것은 바로 이 때가 하나님께서 요셉을 예수님의 장례를 위한 도구로 사용하시는 때이기 때문이었다. 비록 요셉은 유대인을 두려워했지만, 누가복음 23장 41절을 보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게 하는 공회의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고 말씀한다. 그런 요셉의 마음속에 하나님께서 감동을 주셔서 요셉으로 하여금 예수님을 귀하게 장사지내도록 믿음의 결단을 내리게 하시는 것이었다.
요셉이 그동안 숨겨왔던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라는 사실을 드러내자, 또 다른 한 사람도 자신을 드러내게 된다.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고 말한다. 이 니고데모 역시 요셉과 같이 공회원이었기에 예수님이 살아계셨을 때에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 밤중에 몰래 예수님을 찾아왔던 사람이었다. 요셉이 자신을 드러냄으로 인해 그 영향이 니고데모에게 미쳐서, 니고데모 역시 사람들 앞에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감히 그 어느 누구도 예수님을 장사지낼 사람이 없었던 때에, 그 예수님을 위해서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모든 지위와 재산을 던진 사람이었다. 비록 예수님이 살아 있을 때가 아니라 돌아가신 후였지만, 자신의 모든 것을 과연 누구를 위해 던지는 것이 제대로 던지는 것인지를 깨달았던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요셉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서 부활하신다는 주님의 말씀을 이루어가는 도구로 사용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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