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 질 것이요
(요한복음 20장 21-22절)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 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승천할 때까지 40일 동안 주님은 자기의 부활하신 모습을 자기를 따르는 소수의 자들 외에는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았다. 로마서 10장 9절에서『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하나님께서 예수를 다시 살리셨는데, 모든 사람에게 그 모습을 보이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다들 부활을 믿을텐데, 그런데 주님은 안보여 주셨다. 주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따르는 사람에게만 사심일 동안 자신을 보여주셨다.
오늘날 많은 현대 교회는『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기를 원하노라』그것만 설교를 하는 형편이다. 성경은『왕의 아들의 혼인잔치에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다 오게한다』고 말한다. 악한 자나 선한 자나 차별이 없이 다 초대하지만,『예복을 입지 않은 자는 손과 발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던지라』고 말씀하신다.『거기서 슬피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하셨다. 예복을 안 입으면,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다 어두움에 던진다. 많은 현대교회는 이 말씀을 잘 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모습을 아무에게나 보이지 않으셨다. 그래서 우리가 알고 있는 말씀이 있다. 부자가 죽었고, 그 동네에 거지(나사로)가 죽었는데, 거지의 온몸에 헌데가 나 있었다. 그러나 거지는 죽어서 아브라함의 품에 갔고, 부자는 음부에 갔다고 했다. 부자에게는 형제가 다섯이 있으니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말하기를『저 나사로를 살려서 다시 보내면, 죽은 자 가운데 살아난 사람을 보고 그들이 회개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 때 아브라함이 말하기를『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자가 있어도 회개하지 않을 거라』고 했다.
부활의 능력은 놀라운 것이지만『부활을 통하여도 사람은 회개하지는 않는다』는 말씀이다. 회개는 단 한 군데 십자가 뿐이다. 십자가에서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가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저 죽은 예수가 바로 나를 위해서 죽었을 뿐 아니라, 저 죽은 십자가의 시체가 『나』라는 사실을 깨닫고 믿는 것이 회개인 것이다. 성경에 마리아와 마르다의 형제인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죽은 나사로를 살렸지만『예수님께로 돌아왔다』는 말은 없다. 그러니 예수님이 부활하신 모습을 보여주도 인간은 회개하지 않는다.
회개는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은사가 나타난다고 회개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다. 주님이『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라고 하신 것 처럼, 주님이 우리를 보내신다. 그리고 말하기를『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것은 아담을 흙으로 만든 다음에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은 것과 같은 것이다. 아직까지 이들에게 성령이 거하지 않고, 이들 속에는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생명이 없는 상태이다. 육과 혼은 살아있지만 영이 죽은 상태를 말한다. 그들 안으로 하늘의 생명이 들어가도록 숨을 내쉬었다. 부활의 호흡이 들어가도록 하신 것이다. 그러면서『성령을 받으라』라고 하셨다.
성령을 받는 것이 두번 나온다. 첫째는 사도행전 1장 8절에서『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이 때 증인은 부활의 증인이다. 이 말씀은 승천하시기 직전에 하신 말씀이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이라는 말은 성령이『너희 위』에 임하는 말이다. 그러면 능력을 받는다. 복음을 전파할 때 성령이 복음을 전파하는 자의 머리 위에 임하게 된다.
그런데 부활하신 후 40일의 초반부에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면서 그들 안으로 숨을 내쉬었다.『성령을 받으라』고 하셨다. 이 성령은 우리 안에 내재하는 성령이시다. 위의 성령은 보혜사 성령을 말하며, 아래의 성령은 구원의 성령을 말한다. 예수님이『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고 하신 것은 바로 오순절 전에 그들 안에 주님이 거하시기 위함 때문이다.『성령을 받으라』고 하시면서 예수님이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고 하셨다. 놀라운 말이다.『상대방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안에 거하시는 사람에 달려있다』는 말이다.
용서할 사람을 용서해야만 한다. 용서는 아주 힘든 일이다. 특별히 우리의 인생에 실패와 고통과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육신의 생명에는 있을 수 없고, 보복만 생각한다.
이것이 사단이 노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용서하지 않으면 우리는 심판자의 자리에 올라가기 때문이다. 결국『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그 자리에 올라간다』는 말이다. 그게 사단이 하와에게 말한 말이고,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욕망을 가지도록 유혹한 생각이다.『너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하나님처럼 되는거야』라고 뱀(사단)이 유혹한 것이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면 사단이 그 사람을 하나님처럼 되게 만드는 것이다. 무서운 사단의 전략이 들어있다. 그래서 보복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사단이 넘어 뜨릴려고 한다. 주님이 우리를 보내시는 것은 결국 용서하도록 보내시는 것이다. 마태복음 6장 주기도문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했다. 우리 말 번역할 때,『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를 헬라어로 살펴보면『우리의 빚진 것을 탕감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빚을 탕감하여 주옵시고』라고 되어있다.『빚』을 우리 말로 번역할 때『죄』로 해석하여 번역되었다.
예수님이 죄에 대한 예화를 다른 곳에서 한가지 더 했는데, 그 하나는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하는 내용이다. 결국 일만 탈란트 빚을 탕감해 주었지만 그 사람은 몇 데나리온을 탕감해 주지 않으므로 왕이 그 사람의 일만 달란트 빚 탕감을 무효화시키는 내용이다. 우리가 하나님으로 부터 죄를 사함받기 위해서는 주님이 우리가 용서해야 할 사람을 주신다. 왕이 일만 달란트 다 갚기 전에 감옥에 가두라고 했다. 그래서 용서의 비유는 두개다. 빚 갚는 것과 빚 용서하는 것이다. 빚을 탕감해 주지 않으면 감옥에 있게 된다는 말이다.
우리의 길을 막거나 잘못되게 하고 상처를 준 그런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면 우리가 감옥에 간다는 말이다. 마음이 감옥에 갇혀버리는 것이다. 우리가 답답하고 힘든 일의 배경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주제가 있다. 용서해야 할 것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다. 용서하지 못하면 우리의 영적 존재가 감옥에 갇히는 것이다. 예수님이 배신당해서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 가장 비참한 때에 온 인류를 용서하신 것이다. 용서를 하면 부활의 역사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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