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야고보서 1장 13-18절)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시험에는 두 가지가 있다. 사탄으로부터 받는 시험과 하나님의 시험이다. 사탄은 넘어지게 하지만 하나님은 시련을 통해서 믿음을 주신다. 사탄으로부터 받는 시험은 결국 탐욕으로 인한 것이다. 마음 속에 탐욕이 행동으로 나타날 때, 사탄에 의해 미혹을 받는다.『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그러므로 사탄의 시험을 받지 않기 위해서 야고보는 악을 버리라고 말한다.

 경건에도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헛된 경건이고, 다른 하나는 참된 경건이다. 그러면 우리가 평소에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경건이란 스스로 생각할 때, 성실한 마음으로 예배드리고 거룩한 생활을 하는 것으로 여긴다. 그런데 야고보는 이러한 기준들이 사실 참된 경건을 막고 있다는 것이다.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는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고 말했다. 야고보는 여기서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하는 자의 헛된 경건 (자기의 의) 곧 자기 기만의 위험성을 말해주고 있다. 『경건한』이란 헬라어로 『드레스코스』인데, 이 단어에 상응하는 명사 『드레스케이아』는 신약성경에 네 번 나오며, 그 두 번이 26-27절에 나오고 있다. 형용사 『드레스코스』는 공중예배를 드리거나 금식을 하거나 혹은 빈궁한 사람을 구제하는 것처럼 외적으로 경건한 행위를 수행하는 사람을 묘사할 때 사용되는 말이다. 그러므로 야고보가 말하는 경건한 사람이란 1세기 당시 종교적인 제반 행위들 곧 기도나 금식, 예배, 구제와 같은 것으로 표현되는 종교성을 의미한다.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의 그러한 종교적인 행위를 통해 스스로 경건하다고 확신하고 있는 사람이다.

야고보는 만일 그러한 사람이『자신의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면』그의 경건은 헛된 것이며, 따라서 그는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한 사람』이란 아무런 제약 없이 자기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함부로 놀린다는 것은 그 사람의 경건이 헛것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겉으로 경건한 사람인 것처럼 행동하고 또한 스스로 자신이 정말 경건한 사람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에 자기 마음을 속이게 되는 것이다.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한 자는 그 경건의 기준은 자기 자신이다. 자기 스스로 나는 경건하다는 기준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경건은 남들과의 비교에서 오는 경건이다. 만일 우리의 경건이 이처럼 자기 스스로의 기준을 가지고 평가 한다면 다른 사람에 대한 비판과 동시에 자기 자랑이 나오게 된다. 이렇게 되면 그 혀를 재갈 물리지 않는 자처럼 남에 대한 정죄와 자기에 대한 자랑이 터져 나오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다 헛된 경건인 것이라는 것이다.

누가복음 18:9-14절을 보면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고 했다. 유대사회에서 바리새인 그러면 누구보다 경건한 사람들이다. 

참된 경건이란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고 한다. 야고보는 가짜 경건과 대조적으로 구제와 및 세속적 유혹과 관련하여 『정결하고 흠이 없는 경건이 참된 경건』이라고 했다. 특히 여기서 야고보가 참된 경건의 대표적인 행위로 고아와 과부를 환난 중에 돌아보는 구제 문제를 제시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제사가 아니라 자비인 것이며, 종교적인 행위가 아니라 긍휼인 것이다. 마태복음 9:9-13절을 보면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고 했다. 세리는 누가 봐도 경건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바리새인들보다 세리가 의롭다함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바리새인 안에는 긍휼이 담겨질 공간이 없는 것이다. 자기 의로 가득 찬 것이다. 그러나 세리는 주의 긍휼과 자비를 입게 된 것이다. 

야고보는 끝으로 참된 경건은 『세상으로부터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물들지 아니하는』(아스필로스)이라는 말은 의식적인 정결보다는 도덕적인 정결을 의미한다. 성도들의 도덕적 행위는 거듭난 자로 나타나는 자연 발생적인 도덕인 것이다. 야고보는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한다는 것이 참된 경건이라고 했다. 세상의 시대흐름, 세상의 사상과 가치관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이 참된 경건이다. 참된 경건에 이르기 위해서는 세상에 대해서, 죄에 대해서 죽은 자만이 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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