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야고보서 2장 5-9절)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업신여겼도다 부자는 너희를 억압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그들은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비방하지 아니하느냐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 

 
야고보서 2장은 1-13절과 14-26절로 나눌 수 있는데, 1-13절에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에 대해서, 14-26절에서는 행함이 있는 믿음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곧 참된 믿음은 첫째로 외모로 취함이 없는 믿음이어야 하며(1-13), 또한 행함이 있는 믿음(14-26)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야고보는 성도들 상호간에 외모로 취하지 말 것을 강조하고 있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설명했다.『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라고 한다. 두 사람이 회당에 들어오는데 한 사람은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며, 다른 한 사람은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다. 야고보는 여기서 회당이라고 했는데 아마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모이는 장소인 교회를 이처럼 회당이라고 불렀던 것 같다. 야고보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것이 왜 잘못된 일인지를 가정적인 예증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라고 했는데, 원문에 보면 이 사람은 여자가 아니라 남자다. 그리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 (헬라어로 람프람인데 그 기본형이 람프로스) 도 정확히 번역하면 찬란한 옷을 입은 사람이다. 로마 제국에서 가락지를 끼는 것은 공화정시대에는 기사 계급에 속한 부유한 사람들에게만 해당 되었다. 그러나 제정 이후로는 일반 사람들에게로 일반화 되었다. 따라서 손에 금가락지를 끼고 찬란한 옷을 입은 사람은 당시의 권세 있는 공무원이거나 유력한 부자를 가리킨다. 이에 비해 가난한 사람은 더러운 옷을 입고 회당에 들어온다. 여기서 더러운이란 말은 헬라어로 뤼파라(기본형이 뤼파라스) 인데 『먼지가 묻은, 정결치 못한』이란 뜻이라기보다는 『누추한』이란 의미를 가지고 니다. 이는 곧 가난한 사람의 초라하고 보잘 것없는 모습을 가리킨다.

그런데 교회가 이들을 어떻게 구별하여 대하는 것인가?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라고 했다. 교회가 부자와 가난한 자를 구별하여 대하는 것이다. 아름다운 옷을 입고 오는 부자는 환영하며 좋은 자리에 앉게 하고 가난한 자는 멸시하여 아무 데나 앉게 하거나 그냥 구석에 서 있으라는 것이다. 이처럼 교회가 부자와 가난한 자를 구별하여 차별적으로 대하는 것은 서로 구별하여 판단하는 악한 생각이다. 이러한 차별은 하나님의 구원의 원리와는 정반대가 되는 것이다. 

야고보는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찌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라고 했다. 야고보는 너희도 알지 않느냐는 것이다.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것이 어떤 형편에서 부름을 받았는지 알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부자와 가난한 자를 차별대우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대하여 가난한 자를 선택하시는 이유는 자기 자랑거리가 없기 때문이다. 가난하다는 것이 선택의 조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난하다는 것은 단순히 경제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심령이 가난하여 자기 자랑거리가 전혀 없다는 차원에서 보아야 한다. 하나님이 만민 중에서 이스라엘을 택하신 이유는 다른 민족보다 수가 많아서가 아니라 오히려 가장 적은 민족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천하만민의 모델에 해당되는 것이다. 모든 민족이 이스라엘을 보고 배우라는 것이다. 

야고보는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복 주신 자들을 교회가 멸시하고 천대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악한 생각이며, 교회의 본질에 위배되는 모순된 행동임을 밝힌 후 이러한 죄악에 대해 강하게 책망했다. 고린도전서 1장 26-31절을 보면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선택을 하시는 이유는 세상에서 부요하다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기 위함이다. 자기가 무엇을 가졌다고, 무엇을 이루었다고, 착하다고, 의롭다고 하는 모든 것들을 다 철거하시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셨다는 것은 자기의 자랑이 일체 없는 자들이라는 것이다.『이는 아무 육체라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가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을 입었다고 함으로 주님만을 자랑하는 것이다. 

『너희가 만일 경에 기록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고 했다. 여기서 『최고한 법』이란 레위기 19장 18절의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고 하신 말씀을 의미한다. 이웃이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다. 곧 모든 이웃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긍휼을 받았다. 그런데 그들이 먹고 배부르게 되자 그러한 자격이 원래 있었던 것처럼 가난한 자를 학대하고 멸시하였다. 이러한 땅에, 그 율법을 주신 예수님께서 오셨다. 가장 가난한 자로 오셨다. 약하신 모습으로 오셨다. 그들은 이 예수님을 외모로 취급하여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린 것이다. 그들이 최고한 법으로 알고 있던 그 이웃 사랑의 법을 주신 분을 살해함으로 그들의 죄악이 다 드러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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