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야고보서 2장 14-26절)『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 

 
여기서 야고보가 말하는 믿음은 믿음 자체가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야고보가 말하는 믿음에 대해서 믿음은 있는데 행함이 없는 것을 말한다면 이것은 분명히 진리를 부정하는 것이 된다.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말한 다른 복음이다. 갈라디아서를 보면 당시 갈라디아 교회 가운데 예수님을 믿어야 하지만 율법도 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었다. 갈라디아서 3장 1-7절에 보면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줄 알찌어다』라고 했다.

바울은 이런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 저주를 선포하였다. 갈라디아서 1장 6-9절에 보면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라고 했다. 야고보가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바로 갈라디아서에 말하는 행함이 없는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곧 믿음이 있는데 행함이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믿음 자체가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5장 20절 산상수훈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마태복음 5장 21-48절에서 우리가 어떻게 행해야 하는가를 말씀해 주셨다. 우리는 성취된 율법 곧 예수님이 원하는 뜻을 다 행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행함으로 결코 구원을 얻을 수 없다. 오직 우리는 주님의 긍휼로 곧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함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면 그리스도를 의지하지 못한다.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자다.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합당한 삶이 나타나게 된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노라 말만하고 믿는 자로서의 합당한 삶이 나타나지 않으면 그것은 믿음이 없는 것이다. 야고보는 이런 믿음을 죽은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성도가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 3:10-13절에 보면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 주신 것이다(갈 3:19). 그러므로 율법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의 역할을 합니다. 갈라디아서 3장 24절에 보면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했다. 행함으로 구원 얻을 자가 하나도 없다. 오직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믿음 만이 구원의 길이다.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간자는 예수와 함께 죽은 자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합당한 삶이 나타나는 것이다. 첫째로, 긍휼을 행하는 삶으로 나타난다. 자신이 긍휼을 입은 자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형제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난다. 야고보는 『믿음이 있노라고 하면서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느냐,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고 하면서 그 행함의 내용으로 예를 든 것이 형제 사랑이다. 

요한1서 3장 16-19절을 보면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라고 했다.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고 했다. 야고보는 믿음과 행함의 불가불리성을 예를 들어서 설명을 했다. 여기서 ‘나’라는 사람이 요구하는 바는 ‘네’가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데 그렇다면 ‘네’가 가지고 있는 보이지 않는 믿음을 보이는 행함을 통해 내게 보여 달라는 것이다. 그러면 행함이 있다고 주장하는 ‘나’도 나의 행함을 통해 나의 믿음을 증명해 보이겠다는 것이다. 곧 이 구절에서 야고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믿음과 행함이 나눌 수 없다는 것이다. 야고보는 이것을 당연시하면서 도리어 책망조의 질문을 던진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고 했다. 하나님을 둘로 나눌 수 없다. 이와 같이 믿음과 행함을 이원론적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야고보는 귀신들의 믿음을 예로 들고 있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귀신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안다. 자신들을 멸하실 분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 떤다. 그런데 여기서 야고보가 귀신의 예를 든 이유는 단순히 지적으로 아는 것은 우리가 말하는 믿음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무 소용도 없고 효력도 없고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참된 믿음은 반드시 그 행함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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