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
(유다서 1장 1-3절)『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는 부르심을 받은 자 곧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라 긍휼과 평강과 사랑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일반으로 받은 구원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생각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유다서를 기록한 유다는 예수님의 형제 중 요셉과 마리아에게서 난 야고보, 요셉, 시몬에 이어 네 번째로 태어난 동생이다. 성경에는 동명이인 유다가 여러명 등장하는데, 예수님의 열두제자 중 한명인 다데오 유다, 또 가롯유다, 그리고 야고보의 아들 유다, 그리고 유다서를 기록한 예수님의 친동생 유다가 있다. 본래 예수님의 동생들은 어려서부터 한 가정에서 나고 자라온 처지였기에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을 인정하지 않았다. 심지어 요한복음 7장 5절을 보면, 예수님의 공생애가 끝나기 6개월 전인 초막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을 때까지도 여전히 믿지 않는 사람들의 입장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신 후, 고린도전서 15장 5절 이하에 보면,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고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다. 여기에 언급된 야고보가 예수님의 친동생이자 초대교회 예루살렘 교회의 최고 지도자다. 그 후에 예수님의 친동생 유다도 예수님의 부활을 확인한 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게 되었다. 이처럼 처음에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예수님의 형제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후에는 교회 지도자로 헌신했다.
본래 유다는 유다서를 기록하려고 할 때, 구원에 관하여 기록하려 했으나 영지주의로 인해 복음이 변질되고 성도들이 현혹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영지주의 이단을 경계하고 대적할 것을 권면하기 위해 유다서를 기록했다고 밝히고 있다. 당시 물질은 악, 영혼은 선이라는 이원론에 입각한 영지주의는 성경의 가르침을 곡해하였다. 영지주의는 두 가지 모순된 주장을 했다. 첫째는 물질이 악하다 하여 인간의 육체도 악하기에 육체를 학대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래서 극단적 금욕주의에 빠지게 만들었다. 두번째는 인간이 만든 모든 것은 악하기에 도덕도 필요 없다고 주장하면서 영을 개발한다는 허황된 명목으로 육체의 쾌락을 방치하는 극단적 쾌락주의로 빠지게 만들었다. 결국 영지주의는 두 가지 모순된 주장, 극단적 금욕주의와 쾌락주의를 주장함으로 성도들로 하여금 바른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도록 현혹하였다. 이를 경계하고 바른 신앙의 삶을 권면하는 내용이 유다서다.
유다서는 문안인사인 1~2절과 마지막 찬양인 24~25절을 제외하고는 전체가 영지주의 이단에 대한 경고로 이루어져 있다. 유다가 편지한 대상은 부르심을 받은 자 곧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받은 자들이다. 부르심을 입은 자는 바로『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라고 되어 있다. 이 말은 번역이 잘못되어 있다. kjv에는『them that are sanctified by God the Father』, 여기서『사랑을 얻고』가 아니라 『be sanctified』, 루터가 보았던 수용원문에는 헬라어로『하기오스 (ἅγιος)』로 되어 있다. 수용원문이 아닌 것에는『아가파오(사랑)』로 되어 있다. 즉 『거룩함을 입은 자가 부르심을 입은 자』라는 것이다.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받은 자들이다. 그래서 유다가 이러한 사람들에게 편지를 했다. 누군가가 성경을 계속 변개시켜왔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빌립보 간수가 바울을 고문했다. 귀신을 쫒아내는 일들을 한다는 것 때문이다. 고문을 당한 사도바울은 깜깜한 감옥에서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찬양하며, 기도했다. 다른 죄수들도 다 들었다. 주님은 옥문이 열리게 하셨다. 옥문이 열렸지만 바울은 나가지 않았다. 옥문이 열렸으므로 죄수가 도망간 것으로 생각하고, 간수가 자살하려고 했다. 간수가 자살하려고 했기 때문에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그는 바울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너의 몸을 헤치지 말라』는 것이다. 성경에서 빌립보 간수는 두려워서 떨었다고 한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에게 사랑으로 다가오신다. 그래서 의로움을 입게된다. 회개는 그동안 어떻게 살았느냐를 고백하는 것이 초점이 아니라, 그렇게 살게된 것에서 돌이키는 것이다. 돌이키는 것은 그런 삶을 살도록 한 세상에 대해서 죽는 것을 말한다. 두려움으로 하나님께 돌이키는 것이다. 이게 회개다. 로마서 6장 7절에서 말하는『죽은 자가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다.
빌립보 간수가 바울에게『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으리까』라고 말했을 때, 바울은『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라고 말했다. 이게 회개하는『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라는 것이다. 유다가『일반으로 얻는 구원』에 대해서 편지를 쓰려고 했지만,『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에 대해서, 급히 쓰게 되었다고 말한다. 구원에 대한 설명은 두가지의 대상이 있음을 말한다. 일반으로 얻는 구원과 단번에 얻는 믿음의 도를 설명하는 것이다
『일반으로 얻는 구원』은 변하지 않는 진리의 구원을 의미한다. 구원에 대해서 잘못된 인식을 하고 있는 초보의 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필요할 것이다. 왜냐하면 많은 교회에서 구원의 의미를 왜곡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여기에서 믿는 자는 자신이 결단해서 믿는 그런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믿는 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죽은 자이며,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아,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의 선물을 받는다. 갈라디아서 3장 23절에서『믿음이 오기 전에는 율법 아래 갇혀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구원과 회개는 연결되어 있음을 말한다.
그러나『단번에 얻는 믿음의 도』는 구원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고 있지만, 구원에 대해서 멀어지지 않도록 힘써 싸우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된다는 것이다. 유다서 1장 5절에서 『너희가 본래 모든 사실을 알고 있으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고자 하노라 주께서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후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멸하셨으며』하나님이 애굽으로부터 구원하여 내셨지만,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자를 광야에서 멸하셨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구원은 이 세상으로 부터 육체가 떠날 때까지 싸워 이겨야만 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해주신다. 그렇지 않으면 1장 6-19절에서처럼 구원받았다고 믿으면서도, 영적 간음하는 자가 되고, 남을 비판하는 자가 되며, 잘 모르면서 비방하고, 본능적으로 행동하며, 세상 불만을 토로하는 자가 되며, 세상의 것을 자랑하고 좋아하는 그런 자들이 된다는 것이다.
회개가 없으면 하나님 나라의 열쇠인 십자가를 갖지 못한다. 구원은 육체를 떠날 때만 알 수 있는 것이다. 십자가라는 열쇠를 가지고 있는지 아닌지는 마지막 육체의 죽음 앞에서 판가름나는 것이다. 십자가라는 열쇠가 없다면 지나간 믿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믿음이 아니라, 자기가 믿는 믿음에 불과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인가 아니면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자인가로 나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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