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사도행전 2장 39-47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오순절 성령의 강림하심은 기독교 역사를 시작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오순절 성령 역사의 가장 큰 의의는 무엇보다 교회의 탄생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쓴 서신에서 교회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고전 1:2)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거듭난 자,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성도와 성도들간에 이루어지는 성령의 능력이다. 

초대교회의 특징은 사도들의 가르침, 교제, 떡을 떼는 것, 그리고 기도였다. 먼저 교회는 사도들의 가르침 곧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한다. 교회에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세상 이야기만 한다면 교회가 아닌 것이다. 교회가 진리를 말하지 않고 왜곡하여 다른 말을 한다면 이단이 되는 것이다. 진리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이시다. 십자가와 회개를 말하지 않는 곳은 교회가 아니다. 교제는 성도간의 교제를 말한다. 마찬가지로 성경의 말씀을 나누지 않고, 세상의 것만 말한다면, 성도간의 교제가 아니라, 세상의 친목도모가 될 것이다. 떡을 떼는 것은 예수의 죽으심과 연합되는 것을 의미한다. 성찬식을 하는 이유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합되었음을 기억하고, 죽은 자임을 다시 한번 고백하는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되도록 기도하라는 것이다. 세상의 것을 위해서 기도한다면 기복신앙이 될 것이다. 

성령의 임재하심으로 시작된 초대교회는 이전에 없던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했고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당시의 예루살렘교회가 아름다울 수 있었던 것은 교회가 재정이 넉넉했기 때문도, 당시의 사회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유력한 인사들이 교회 내에 많았기 때문도 아니었다. 가난했지만 서로가 한 가족이었고 서로에게 헌신하는 마음이 있었다. 이러한 마음이 있었기에 성도들은 자신의 재산을 기꺼이 내어놓을 수 있었다.『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었다』는 것은 강요된 행위가 아니라 각 개인의 자발적인 헌신과 참여에 따른 것이었다. 예루살렘교회는 신약시대 교회들의 모태가 된 교회였지만 이방 교회들로부터 구제헌금을 전달받아야 할 정도로 재정적으로 열악한 교회였다. 그럼에도 성령께서 주신 순수한 기쁨과 아름다운 교제는 이 교회를 세상의 그 어떤 조직이나 집단보다 풍요롭게 해주었다. 

구원받는 사람이란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구원받을 수 있는 자라는 말이다.(kjv) niv에서는『구원받았던 자』라고 번역되어 있다. 설교를 듣고 47절에서『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신도의 수라는 것이 삼천명의 혼이 더해졌다는 것이다. (kjv) 구원받은 자가 아닌, 구원받을 수 있는 자가 삼천명이 되었다는 말이다. niv는 신도의 수로 표기 되어있다. 성경의 번역이 애매모호한 경우가 많다.

『믿고 세례를 받으면 구원받는다』는 전제 아래 번역된 것으로 추정된다. 빌립 집사를 따라 다녔던 마술쟁이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았지만, 베드로가『악독이 가득한 자』라고 말했다. kjv는 500여년 전에 영국에서 번역된 것이나, niv는 50여년 전에 미국에서 번역한 것이다. 빌립보 간수가 바울에게『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겠나이까』라고 말했더니 바울이『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라고 말했다. 빌립보 간수는 회개한 자였다. 그러나 마술쟁이 시몬은 회개하지 않은 자였다. 

빌립보 간수는 옥문이 열려있는 것을 보고 칼로 자결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후 바울의 음성을 듣고 두려워 떨었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회개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만 할 수 있다. 오늘날 하나님 말씀에 무감각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상황에 대해서 핑계를 대거나 상대방에게 책임을 전가시킨다. 이것이 옛뱀의 전략이다. 회개하지 않은 자들이 이런 상태다. 회개는 하나님이 크고 두려우신 분임을 알게되고, 자신이 타락하고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깨닫는데서 출발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이 나의 중심이 된다. 내게 유익하면 행하고 싫으면 행하지 않는 자가 된다. 

회개한 자는 내게 유익하던 아니던 관계없고, 오직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것 뿐이다. 오늘날은 많은 경우 자기 구원을 찾는다. 내가 구원을 받았는지 못받았는지에 관심을 갖는다. 구원받는 사람은 우리를 지으시고 창조하신 하나님을 찾고, 죄인임을 깨닫고 내 죄를 대신해서 죽으신 예수를 찾고, 예수와 연합되는 것이다. 예수와 연합되는 길은 좁은 길이다. 좁은 길로 가는 자가 회개하는 자다. 회개는 주인이 바뀌기 때문이다. 세상을 사랑하는 자는 넓은 길로 가는 자들이다. 그러나 십자가의 예수와 연합되는 자는 좁은 길로 가는 자다. 

좁은 길로 가는 자는 세상의 일로 근심 걱정하지 않는다. 예수가 주인이기 때문이다. 회개의 의미도 모른채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생각하는 자는 예수가 주인이 아니라 마귀가 주인이기 때문에 세상이 좋게 느껴지는 것이다. 회개하는 자는 세상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나도 마음으로 세상을 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를 믿으면서 세상을 부러워하고 세상을 사랑한다면 그것은 가짜 믿음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교회에서 기복적인 신앙관을 가지고 있다면 가짜 믿음에 있는 자들일 것이다. 진짜 축복은 세상의 일에서 벗어나 주님과 연합되는 길이다. 예수로 인해서 핍박받는 것이 진짜 축복이다. 

구원은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회개한 자는 예수 외에는 관심이 없다. 이것만이 구원이다. 『옛것은 지나갔으니 새사람이 되었도다.』광야에서는 옛사람이던지 새사람이던지 둘 중의 하나다. 옛사람은 이스마엘이고 새사람은 이삭이다. 이스마엘이 이삭으로 되지는 못한다. 옛사람과 새사람은 서로 다른 존재다. 많은 경우 교회 사람들은 옛사람이 새사람으로 변해간다고 생각한다. 옛사람이 새사람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옛사람이 죽어야만 새생명이 태어나는 것이다. 왜냐하면 십자가에서 옛사람이 죽어야만 새생명으로 부활하기 때문이다. 십자가가 없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바울은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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