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사도행전 17장 19-34절) 그를 붙들어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네가 말하는 이 새로운 가르침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 있겠느냐 네가 어떤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 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하니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였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라 하니라 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이에 바울이 그들 가운데서 떠나매 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하여 믿으니 그 중에는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
바울의 2차 전도여행 때 아덴(아테네)에서의 전도에 대한 말씀이다. 아덴에서 실라와 디모데를 기다리던 바울은 아덴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 광경을 본 바울에게 격렬한 분노가 일어난 것이다.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했다. 그 사람들 중에는 쾌락주의자들인 에피쿠로스주의자들과 이성을 절대시 하던 스토아 철학자들도 있었는데 그들 중 어떤 자들은 바울에 대해 쓰레기 같은 말쟁이라고 욕을 한 것이고, 또 어떤 자들은 바울을 이방 신들을 전하는 자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자 그들은 바울이 전하는 말을 좀 더 상세히 듣기 위해 사람들이 북적대는 장터에서 떨어져 있는 독립된 공간인 아레오바고로 바울을 데리고 간 것이다.
바울이 아덴사람들에게 종교심이 많다고 말했다. 알지도 못하는 신을 섬긴다고 지적했다. 바울은 참 하나님을 소개하며, 회개할 것을 말했다. 바울이 아덴의 아레오바고에서 전한 내용은 하나님만이 살아계신 창조의 참 신이시라는 것과 예수님의 부활이었다. 바울의 설교를 들은 이들 중에는 바울의 설교를 황당한 말이라고 조롱한 이들도 있고, 생각을 하게 된 이들도 있고, 믿은 이들도 생겨난 것이다.
사도바울은 앞 장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말하는데,『창조하신 일 가운데 누구나 하나님을 알만 한 것이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아테네 사람들에게『회개하라』고 했다. 우리를 구원하는 복음의 시작은 회개다. 예수를 믿지 않다가 믿게 되는 것을 믿음이라고 하지만,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설교되고 있는 내용들 중 상당 부분이 구원할 수 없는 가짜다. 주님이 구원받지 못하는 니고데모에게 부정적인 말을 했다.『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들어갈 수 없느니라』회개해야 주님이 믿음을 주신다. 사도바울이 디도에게 말하기를『하나님의 택하신 자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즉 택하신 자의 믿음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대부분 교회에서는『부르심을 받으면 다 구원받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부르심을 받는 사람은 많지만 택하심을 받는 사람은 적다. 구원의 믿음은 택하신 자의 믿음이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여기의 믿음은 거듭난 자의 믿음이다. 교회 처음 나와서 『오늘부터 예수믿겠습니다』라고 하는 그런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변화받는 믿음이다. 변화받는 믿음은 부모로 부터 받은 그 생명에서 다른 생명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그 다른 생명이 바로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생명이라는 말이다. 생명이 바뀌지 않으면 천국을 갈 수 없다. 한 생명에서 어떤 노력으로 서서히 바뀌는 그런 생명이 아니라 한 순간에 다른 생명으로 치환되는 그런 생명이다. 그런데도『여러분, 변화하셔야 구원받습니다』라고 말들을 한다. 변화의 주체가 누구라는 말인가? 자기가 변화의 주체가 되면, 내가 노력해서 얻을 수 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주님이 99%를 변화시켜 주시지만 예수를 믿는 자기도 조금은 노력해야만 된다는 식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변화를 위한 노력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변화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회개하며, 변화받기 위한 육적 자아의 죽음 외에는 없는 것이다.
구원의 조건에 대해서 믿음이 먼저가 아니라 회개가 먼저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회개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인가? 교인들은 회개 설교를 싫어한다. 회개를 싫어하면 구원받지 못한다. 그러나 회개처럼 기쁜 일은 없다. 예를 들어 옆집에 경찰이 살면 마음의 평강이 올지 모르겠다. 그러나 도둑이 사는 집의 옆에 경찰이 살면 불면증이 올지도 모른다. 회개를 설교하면 왜 싫어할까? 마귀는 빛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회개보다 더 기쁜 것은 없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 사람들 대부분이 회개보다 성령을 더 좋아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는가? 성령 체험하는 집회가 가장 인기를 끈다. 그것 자체가 구원받지 못한 증거다. 성령 체험해도 회개하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
예수님은『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요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할찌니』라고 했다. 그러나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주여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하며, 능력을 행하며, 귀신을 쫒았나이다 라고 말할거라』고 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은『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나를 떠나라 내가 너를 모른다』라고 하신 것이다. 예수 믿으면 우리가 주님을 알게되지만, 회개하지 않고 생명이 바뀌지 않으면『주님이 모른다』라고 말하실 것이다. 구원은 철저하게 회개에 달려있다. 왜 계속 회개를 강조하고 있는가? 회개한 사람은 요한계시록에서 말하는 것처럼, 어린양을 따라간다. 어린양은 고난받고 죽으러 간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십자가가 마치 믿을 때의 초보 단계로 생각한다. 십자가는 처음이요 완성이다. 사람들이 성령을 추구할 때는 예수믿은 후, 지겨울 때 십자가가 아니라 성령을 따르는 것이 마치 신앙이 좋아지는 것인 줄로 생각한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에서는『십자가의 도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하고, 2장에서『나는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했다』고 말했다. 고린도교회는 은사에 치중했던 교회다. 사도바울은 삼층천에도 가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외 수많은 은사를 가진 자였지만, 십자가만 구한 것이다. 구원은 회개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와 연합되는 것 외에는 길이 없는 것이다. 회개는 자신이 구원 받을 수 없는 육적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데서 시작된다. 그리고 예수님이 죽으신 십자가와 마주 서서, 그 십자가가 『나』라는 육적 존재의 십자가가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자아는 반드시 죽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와 연합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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