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안으로 들어온 영지주의 사상

영지주의는 그노시즘(영어로는 나스티시즘)이러고 불리운다. 그노시스는 헬라어로 신비적이고 계시적이며 높은 지식, 또는 깨달음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영지라는 말은 영적 지식을 의미하며, 그래서 우리말 번역은 영지주의로 되어 있다. 위키백과 사전을 보면『영지주의 운동가들은 그노시스를 통해 인간의 참된 기원이 지고한 신성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이 깨달음을 통해 인간의 성품 중 영적 요소 즉 영이 물질계를 벗어나서 자유롭게 된다고 주장한다』고 말하고 있다. 

영지주의의 근본적 사상은 인간에게 신성이 있는데, 물질인 육체에 영이 갇혀있어 신성이 감추어져 버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지혜를 통해서 신성을 회복하여 신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영지주의를 주장하는 자들은 어떤 하나의 형태로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상적 견해가 다양하다. 어쩌면 기독교를 제외한 모든 종교가 영지주의의 한 분파가 될 수도 있다. 그런데, 기독교에 이런 사상이 들어왔다면 아마도 놀라울 것이다. 

교회 사람들은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로 창조하셨는데,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므로 하나님의 형상이 사라져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죄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죄에서 벗어나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하나님이 예수의 피를 통해서 모든 죄를 사해주시며, 그로 인해서 하나님이 예수를 믿는 자에게 성령을 보내주시므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에덴동산에서 지은 원죄는 벗어났지만, 현재와 미래에 죄를 짓지 않으려고 계명을 살펴보면서 철저한 신앙생활을 해야하며, 죄를 지으면 곧 바로 예수의 피로 용서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죄를 이기기 위해서는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거룩한 생활을 해나가야 한다고 믿고 있다. 

하나님의 형상은 신이 될 수 있는 신성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골로새서 1장 15절에서『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 보이는 모습으로 나타난 분이 예수님이다. 하나님의 형상이 없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자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유지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신앙생활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데서 비롯된다. 기독교인들 중 열심히 신앙생활 잘해서 하나님의 형상이 사라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은 형상을 신이 될 수 있는 신성으로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만일 그렇게 생각하다면 영지주의를 믿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의 많은 사람들은 죄의 문제를 오해하고 있다. 죄를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이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죄를 짓게 하는 마음(탐욕)이 죄의 결과를 갖게한다. 그런데, 죄의 결과만 보고, 죄의 원인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것이다. 그래서 죄를 짓지 않으려고 날마다 계명을 생각하고, 죄를 짓는지 죄를 짓지 않는지 살펴보는 것을 반복하고 있다. 계명을 어기면 죄이고, 계명을 어기지 않으면 죄가 아닌 것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어떤 이들은 혼자서 자기 만의 생활 패턴으로  신앙생활하거나, 선한 활동을 통해서 죄를 멀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죄를 짓게 하는 것이 마귀이므로, 마귀야 물러가라 라고 주문 외우듯이 외친다. 이런 행동들은 인간의 마음의 탐욕을 해결하기 전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해결방법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죽으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에게 하나님이 성령의 능력으로 부활시켜주신다. 이것이 거듭남이다. 거듭남은 마음의 변화 정도가 아니라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다. 

많은 교회 사람들은 예수를 믿으면, 성령이 오시는 것으로 생각한다. 예수를 믿는 것은 예수와 함께 죽고 다시 태어남을 믿는 것인데, 예수 이름만 믿으면, 모든 죄가 사해지고 성령도 선물로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성령은 예수와 함께 죽지 않으면 오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와 함께 죽지도 않으면서, 성령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다. 사도행전을 보면 마술쟁이 시몬이 돈을 주고 성령을 살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기도 했다. 심지어 오늘날은 많은 교회에서 성령체험이니 은사를 강조한다. 신비한 체험을 통해서 하나님이 역사하신다고 믿는 것이다. 신비한 체험을 통해서, 그 사람에게 성령이 역사하여 거룩한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거나, 그 사람이 신성을 가진 자가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은사에 대해서, 하나님의 예언 능력을 받았다고 하며, 다른 사람의 미래에 대해서 예언을 하거나, 국가나 사회에 어떤 사건들이 일어날 것을 예언하기도 한다. 신비한 말(방언)을 통해서 하나님과 직접 소통하여 병도 낫게 해주고, 이 땅에서도 복을 받아서 잘되게 해 달라고 빌고 있으며, 혹시라도 문제가 해결되면 신통한 능력을 가졌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게 영지주의에서 말하는 감추어진 신성을 깨우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행위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하나님이 초대교회 당시 제자들에게 허용하신 것인데, 오늘날 많은 교회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에 있는 신성(하나님의 형상)을 깨우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영지주의를 추구하는 종교들은 대부분 사상이 같다. 마음 속에 있는 신성을 깨우는 것이다. 그래서 노력으로 그것을 이루어 보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종교통합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나 기독교는 전혀 다른 이야기다. 성경(로마서 1장)은 인간의 마음에 신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악한 탐욕만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이 마음의 탐욕이 바로 자기라는 옛사람이다. 열심히 거룩한 생활을 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옛사람이 죽으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자기를 부인하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말씀을 배경에 두고 하신 말씀이다. 왜 마음의 탐욕이 기독교에서는 죄인가?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탐욕이기 때문이다. 영지주의 자들은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마음을 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 스스로 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뿐만 아니라,  인간이 행동해야 하는 행동주의 복음을 강조한다. 이것은 예수를 믿지만 율법주의의 행위를 혼합시키는 행동주의 복음인 것이다. 그들은 행위가 없는 믿음은 가짜라고 강조한다. 예수님도 모든 율법을 지켜서 의를 이루었다고 충동질한다. 이것은 적극적 순종이라는 교리에 의거한다. 행위를 수반하는 믿음은 믿음으로 행위가 나타나는 것을 의미하며, 행위가 나타나지 않는 믿음은 참 믿음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서 말하는 믿음은 행위를 수반하지 않는 믿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모든 죄가 예수의 피로 용서받는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행위를 수반하는 믿음은 예수와 함께 죽는 자는 예수와 함께 부활하는 것을 믿는 것이다. 예수와 함께 죽는 것이 바로 믿음의 행위가 된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혼과 영과 골수를 쪼개기까지 하며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