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믿으면서 율법주의를 추구하는 자

오늘날 기독교 내에서는 복음과 율법을 구분하여 말한다. 『율법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복음으로 구원받는다』라고 말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함정이 있다. 우리는 율법과 율법주의를 구분하지 못하면 이런 함정에 빠질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율법주의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복음으로 구원받는다』라고 말을 하는 것이 바른 말일 것이다. 교회에서 흔히 말하는 계명을 지켜 행하는 모든 행위들은 율법주의인 것이다. 

율법과 율법주의를 구분하는 것은 구원에 있어서 너무나 중요한 일이다. 율법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의 의에 이르도록 명령하셨다. 백성들은 율법의 계명들을 지키려고 했으나 지킬 수 없었다. 그래서 모두가 동물의 희생제사를 통해서 죄에서 벗어나려고 한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은 너희들은 모두 죄인들인데, 율법을 통해서 그러한 사실을 깨달으면, 희생제사를 통해서 약속의 씨(그리스도)를 발견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창세기 3장 15절에서 여인의 후손을 약속하셨다. 그리고 날마다 드리는 제사를 통해서 여인의 후손인 그리스도를 발견하기를 바라셨던 것이다. 따라서 율법은 곧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하나님의 말씀이신 것이다. 히브리서 11장 24-26절에서 모세가 그리스도를 만났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누가복음 24장 27절에서 길을 가다가 두 사람의 제자와 대화를 나누는 중에『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자기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그리고 갈리리 바닷가에서 누가복음 24장 44절에서 같은 말씀을 하고 있다.『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나 라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결국 구약시대 율법 속에서 알려주시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씀이다. 

예수님이 요한복음 5장 39절에서『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여기에서도 성경은 바로 율법을 의미한다. 율법이 말하고 있는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라는 말씀이다. 이사야서 34장 16절에서『너희는 여호와의 책에서 찾아 읽어 보라 이것들 가운데서 빠진 것이 하나도 없고 제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령하셨고 그의 영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여호와의 책은 율법을 의미한다. 모든 율법을 다 읽어보면 그 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음을 알려주시는 것이다. 

율법 속의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죄인들은 동물을 죽여서 그 피를 제단에 뿌렸다. 제사장은 죄인으로부터 죄를 동물에게 전가시키고, 죄인을 대신해서 동물이 죽는 것이다. 그런데, 그 죽은 동물이 다름 아닌 죄인이라는 것이다. 비록 대신 동물이 죽지만, 죄인과 동물이 연합되어, 죄인이 죽은 것이다. 그래서 희생제사를 통해서 다시 태어남을 알려주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과 연합되는 자는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새 창조에 속한다. 히브리서 9장 11절에서 이 세상의 창조와 같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과 니고데모가 서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요한복음 3장 1-9절에 나타난다. 예수님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말을 했다. 그런데,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3장 10절에서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비난의 말씀하신 것이다. 이스라엘 선생(랍비)들은 제사에 관한 규칙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제사를 통해서 죄인을 대신해서 동물이 희생당하고, 그 결과로 인해서 죄인이 죽고 다시 태어나는 진리를 왜 깨닫지 못하느냐 라는 의미가 된다. 

이렇듯 율법 속에는 그리스도가 숨겨져 있다. 따라서 율법은 엄밀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인 것이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율법) 속에 생명나무(그리스도)가 숨겨져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인 것이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를 통해서 죄를 깨닫게 해주시는 것이다. 죄는 그 열매를 먹는 것 이전에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탐욕의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그 나무를 통해서 그 탐욕의 마음이 있음을 바라보라는 것이다. 계명을 지키면 죄가 아니고,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죄라는 이분법적 논리가 율법 속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게 바로 율법주의라는 것이다. 

율법은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율법주의는 그리스도를 제거한 인본주의 사상인 것이다. 율법주의와 인본주의 사상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교회 안에서 만연한 율법주의(인본주의) 사상은 나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내세우게 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십계명이다. 십계명 속에서 죄를 발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계명에 얽매여 그것을 지키느니 마느니 하는 것이다. 십계명은 하나님의 계명이지만, 하나님의 죄인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마치 부모가 자식을 향한 사랑을 생각하게 한다. 규정에 얽매이게 하는 것이 율법주의다. 

또한 예수님을 닮아 거룩한 생활을 하도록 강요하거나, 경건한 신앙생활을 하도록 지침을 내라는 듯한 말도 다 율법주의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을 하면서, 생활 속에서는 자기를 나타내려고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시는데, 많은 목사들은 자기를 살리고 있는 실정이다. 모든 인간들은 죄인들이며, 하나님 앞에서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들로서,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삶 외에는 방법이 없음을 우리는 기억해야만 한다. 『날마다 죽노라』라고 외치는 사도바울의 말을 기억하지 않으면, 율법주의(인본주의)에 빠져버리는 것이다. 

율법주의에 빠지는 자들의 모습은 행동을 강조한다. 야고보가 말하는 규정을 들어서 행동이 나타나도록 하는 것이다. 야고보서 2장 26절에서『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라고 말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행함으로 나타나지만, 행함을 의무적인 규정처럼 생각하게 한다면, 율법주의 생각인 것이다. 행동을 강조하는 자들은 율법주의(인본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다른 종교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율법주의(인본주의)를 섞는 기독교는 이미 참된 진리의 복음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미 모든 종교가 통합적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자각해야만 한다. 그래서 오늘날 성도는 교회 안에서 영적 분별이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영적 분별이 있으면, 열처녀의 비유처럼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복음과 율법주의(인본주의)가 섞여 있음을 알게한다.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도 마찬가지이며, 양과 염소의 비유도 마찬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사탄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율법주의(인본주의)와 섞으려고 계속 시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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