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요한계시록 3장 7-13절)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사탄의 회당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그들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여섯 번째 편지를 받은 곳은 빌라델비아 교회다. 빌라델비아는 무시아와 브루기아, 루디아가 만나는 접경에 있는 도시였으며, 동방과 서방을 연결하는 관문으로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도로가 있었다. 포도재배와 포도주 산업이 아주 활발하였고, 온갖 신전이 즐비하여, 작은 아테네라는 별명으로도 불리었다. A.D. 17년, 소아시아에 발생한 대지진으로 빌라델비아를 포함한 10개 이상의 도시가 초토화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믿음 생활을 이어갔던 빌라델비아 교회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 가장 영향력이 없던 교회였다. 동서양 관문에 위치한 빌라델비아 교회는 문을 열고 닫음이 어떤 의미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분이 열어놓은 것은 닫을 수 없고, 그분이 닫았다면, 누구도 열 수 없다. 빌라델비아 교회를 위해 하나님이 세상의 모든 문을 열었다고 선언하신다. 복음의 문이다.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평가는 작음이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작은 능력을 가졌던 교회였다. 에베소와 서머나, 버가모 내노라하는 도시에 자리 잡은 영향력 있는 공동체도 아니었고, 선교사역 등 어떤 일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교회는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고, 예수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다.
당시, 유대인의 회당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전하는 통로 역할을 했다. 바벨론 포로기 이후, 말씀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분투했던 약속의 백성들은, 차츰 변질하기 시작했다. 말씀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말씀을 전할 때도, 사람들은 자신들의 전통을 앞세웠고, 바울을 통해 주신 복음 앞에서도 사람들은 전통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려 했던 것이다. 그랬기에, 빌라델비아에 쓴 예수님 편지에는 주님의 회당이 되어야 할, 회당이 사탄의 회당으로 되었다고 표현되었다. 사탄의 회당은 자신들의 이득을 지키기 위해, 거짓으로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교회가 거짓 복음을 전하는 것은 셀 수 없이 많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핵심은 복음과 율법에 대한 오해와 편견이었다. 복음은 받아드리지만, 율법을 지키는 것도 중요한 신앙의 태도로 여겨졌다. 왜냐하면 율법도 하나님의 말씀이고, 특히 십계명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지극히 당연한 명령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대부분의 교회의 이러한 이러한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지키도록 명령하셨다. 그래서 그들은 목숨처럼 소중하게 이를 여기고 지키도록 노력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을 하나라도 지키지 못하면, 항상 동물을 죽여 제사를 드렸다. 즉 율법을 지켜야 하지만, 지킬 수 없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율법을 백성들에게 주신 가장 중요한 목적은 죄를 깨닫게 해 주는 역할을 했다. 죄를 깨닫고, 율법 속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들어가라는 것이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속에 감추어진 생명의 나무를 발견하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복음을 받아드리면, 이제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가 라는 질문을 한다.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속으로 들어간 자는 율법을 다 지킨 것으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것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율법에 대하여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성도 역시 율법에 대해서 죽은 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십계명의 규정을 들어서, 사람들은 사랑하라는 규정이 있으므로 사랑해야지 하면서, 의식적으로 사랑하도록 노력한다. 여기에서 이웃을 사랑하는 의미는 죽었던 영을 살리는 것이다. 영을 살리기 위해서 네 몸과 같이 하라는 것이다. 자기 몸과 같이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자는 이 세상에서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행하지 못할 경우 그는 십계명을 어긴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 대하여 죽어야 할 존재가 되었으며, 그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 동물을 죽여 제사를 지내야 한다. 죽은 동물이 곧 그 죄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이제는 제사를 지낼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 규정의 의미를 기억하면서, 우리는 영을 살려야 한다는 당위성을 생각하면서, 규정의 세밀한 것을 벗어나, 성령의 인도를 통해서 이웃의 영을 살리는 일에 동참하는 것이다. 이러한 세밀한 규정들을 지켜야 한다는 법적 의무감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에 대해서 죽었으므로 사라지고, 성령의 능력이 그 자리를 대체하는 것이다. 의무감 강박감으로 규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영적 자유함 속에서 규정의 틀에서 벗어나 이웃을 대하는 것이다.
율법의 하나인 십일조를 내야만 하는 것도 이런 의무 규정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의무감의 십일조가 아니라 사랑의 헌금으로 대체되는 것이다. 또한 날마다 죄를 회개하고 용서를 빌어야 한다는 것도, 의무감 속에서 죄를 회개해야 한다는 강박감 속에서 죄를 바라 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죄로부터 해방시켜 주셨으므로, 그 죄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나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죄의 본질은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옛사람의 탐욕이다. 죄에 대해서 예수와 함께 죽어라는 것이다. 죄에 대해서 죽은 자가 되지는 않고 날마다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존재로 단정지우고 죄를 매일 고백하고 죄를 용서를 빈다면, 그는 죄에 대해서 죽지 않은 자이며, 하나님의 새언약의 말씀을 믿지 않는 것이다.
세상의 교회 안에서, 더 이상 죄에 대해서 고민하지 말고, 죄에서 벗어나라고 말한다면, 그 순간부터 이단으로 취급받을 것이다. 누구의 말이 맞는가? 정말 시험에 들게 될 것이다. 인간은 죄를 지을 수 밖에 없으므로 날마다 죄를 회개하고 용서를 빌어야만 하는가? 그래서 날마다 주문 외우듯이 그렇게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빌어야 하나님이 죄를 용서해 주시는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죄를 다 가지고 하나님 나라로 가셨으므로, 죄에 대해서 예수와 함께 죽은 자라는 것을 믿고 죄에서 벗어난 자유인이 되었음을 믿을 것인가? 어느 것이 인내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되는가?
율법이든 복음이든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있다. 둘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다. 율법은 엄격한 규정을 내세워 그것을 깨닫도록 하시고, 복음은 죄로부터 벗어나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다. 엄밀히 율법 속에 복음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제 죄의 그물과 같은 율법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어 성령의 능력으로 나아가라고 하는데, 계속 율법을 고집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새언약의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새언약은 율법을 벗어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새생명으로 나아가게 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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