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사망이라
(요한계시록 21장 8절)『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세상 사람들은 마치 문둥병처럼 모르고 살고 있다. 하나님의 기준은 변함이 없다. 8절에서 8가지를 말하고 있는데, 그 중 첫째가 두려워하는 자들이다. 두번째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어떠한 자들인지 모르고 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애굽을 나오지 않은 사람들도 있지만, 가나안을 들어가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허다하다. 세상에서 잘되는 기복신앙에 싸여 있는 사람들이다. 천국은 그 다음이다. 세상에서 잘되고 그 다음 천국을 소망하는 자들이다.
두려워하는 자들을 주님은 위로하지 않으신다. 잠언에 사람을『사람을 두려워하는 자는 올무에 걸리거니와』라고 했다. 속박에 걸린다는 말이다. 사람을 왜 두려워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있을 때 우편강도가 좌편강도에게『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느냐』라고 한 말을 상기해야 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회개를 하지 않은 사람이다.
요한계시록 13장 14-15절에서『짐승 앞에서 받은 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 그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악한 영을 불어넣은 우상에게 절하지 않으면 다 죽인다는 것이다. 우상에게 절을 하던 안 하던 모든 것은 사람들의 선택에 달려있다. 사람을 두려워 함이 우상에게 절하게 만든다.
요한계시록 14장 9-12절에서『또 다른 천사 곧 셋째가 그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이르되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구원받는 믿음에는 인내가 필요하다. 인내는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세상에서 염려하는 것은 내가 주인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할 일은 주님을 신뢰하고, 주님만 바라보고, 순종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10장 28절에서는 사람을 두려워하고, 주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주님을 두려워하는 자만 구원받는다. 주님이 계시고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주님보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자는 회개해야만 하는 것이다. 구원은 언제나 같은 것이다. 다니엘 시대나 에스더처럼 상황이 더 어렵게 되더라도 주님께는 마찬가지인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어려움이 왔을 때『이것이 하나님께 어려울까?』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구원과 하나님보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마음은 함께 있을 수 없다. 구원과 염려는 함께 있을 수 없다. 구원에 대한 믿음이 들어오면 염려는 나가게 되어 있다.『염려가운데 구원받았다』고 하는 것은 거짓이다. 빛과 어두움은 함께 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빛이 들어오면 염려의 어두움이 나가는 것이다.
마태복음 10장 32-33절『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사람을 두려워하므로 사람들 앞에서 예수를 시인하지 못한다. 베드로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기 전 세번이나 예수를 부인한 것이 바로 두려움 때문이었다. 오순절에 성령을 받아 앉은뱅이를 일으킨 베드로였지만 갈라디아서에서는 율법을 따르는 유대인들을 보니 두려워했다는 말이 나온다. 주님을 끝까지 바라보고 잡지 않으면 어느 순간 두려움에 빠지고 말 것이다.
불과 유황이라고 했다. 20장 14절에서『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둘째 사망은 곧 불못이라고 했다. 불못이라는 단어는『백향목 나무의 진』을 말한다. 창세기 6장에서 방주의 진이 유황으로 번역된 것이다. 『백향목 나무의 진』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하나님 말씀이다. 불못(백향목 나무의 진)은 하나님 말씀과 성령을 의미하며, 말씀과 성령에 의해 모든 것이 불살랐음을 의미한다. 불은 성령을 상징한다. 못은 물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한다. 성령과 하나님 말씀 속에 던지운다는 것이 둘째 사망이라는 것이다.
첫째 사망은 육체의 죽음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동안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옛사람(육적 몸)이 장사되는 것을 의미한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위해 죽었지만, 그 죽음은 믿는 자에게는 자신이 죽은 것임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합되는 것이다. 이것이 첫째 사망이다. 첫째 사망에 참여하는 자는 둘째 사망에 들어가지 않고, 바로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자가 된다. 그러나 첫째 사망에 이르지 않은 자는 둘 때 사망에 들어간다. 곧 음부에 들어가는 자가 되는 것이다.
음부는 어떤 곳인가? 부자와 나사로는 둘다 죽어서 음부에 갔다.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부자는 불꽃 가운데 있었으며, 그들 가운데 큰 구렁텅이가 있어서 건너갈 수 없는 상황이다. 아브라함의 품에 있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부자가 있는 음부에 간 자들은 말씀과 성령의 불로 둘째 사망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므로 바리새인들이 이를 지적하고 나섰다. 그래서 예수님이 누가복음 16장의 말씀을 하시게 된 것이다.『한 부자가 있어』부자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의미한다. 성경에서 부자를 말할 때, 세상의 부자라는 말이 아니라,『하나님에 대해서 스스로 자기의 의를 지키려고 하는 자』를 지칭한다. 하나님께 대하여 구할 것이 없는 사람을 말한다. 요한계시록 3장 17절에서 예수님이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내용이다.『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간절한 마음이 없다는 것이다.
거지는 가난의 대명사다. 가난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가난한 것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하나님 나라를 떠났으므로 이것을 깨달을 때 영이 그렇다는 것이다. 거지는 세리와 죄인들과 같이 하나님께 대하여 감히 고개를 들 수 없는 그런 자라는 것이다.『나사로』라는 이름은 헬라어로 나자로스인데, 히브리어는 엘 아사르라 부른다. 엘은 하나님이고, 아사르는 도움을 얻는 의미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라는 의미다. 나사로는 왜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갈 수 있었는가? 하나님은 사람들의 어떤 행위를 보고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보고 구원하신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다는 것은 아브라함과 동일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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