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야고보서 2장 13-26절)『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2장 13절『긍휼을 행하지(포이에산티)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아넬레우스) 없는 심판(크리시스)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크리세오소)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카타카우카타이)』

크리시스는 판단으로 번역된다. 아넬레우스는 기쁨이다. 크리세오소는 크리시스의 소유격으로, 판단의 긍휼이다. 우리말 번역에서는 크리세오소는 목적격으로 되어있으나, 원문에는 소유격인 것이다. 카타카우카타이는 카타(~아래서)와 카우카타이(자랑한다)의 합성어다. 

2장 12절에서 자유의 율법(그리스도)을 통해서 판단을 받아야 한다고 말한 바가 있다. 성도가 예수님을 자신의 주로 영접하는 것은 그 분의 판단을 받기 위함이다. 긍휼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인데, 이  긍휼을 다른 사람에게 행하지 않으면, 그리스도로부터 긍휼없는 판단을 받게 된다.(기쁨이 없게 된다) 성도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긍휼로 죽었던 영이 살아났는데, 형제의 영을 살리는 일에 무관심하다면, 그리스도의 긍휼없는 판단이 되는 것이다. 성도가 그리스도의 판단을 받고 행하면 긍휼(기쁨)이 되고, 자랑하게 된다. 

2장 14절『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에르가)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헤 피스티스)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소사이) 능히 할 수 없다(메 튀나타이)』

2장 13절에서 행함은 『포이에산티』이지만, 14절의 행함은 에르가(사역)이다. 포이에산티는 긍휼을 행하는 것(영을 살리는 것)이지만, 에르가는 교역자가 하나님의 사역을 하는 것이다. 대부분 교회 사람들은 믿음과 행함에 대해서 믿음은 예수를 믿는 것, 행함은 교회 밖에서 어떤 도덕적인 것을 행하는 것을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믿음과 행함의 의미는 믿음있는 교역자가 사역(영을 살리는 것)하는 것을 의미한다. 믿음은 믿음이 나타나는 행위(예배, 기도, 교회생활 등)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호로고스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도의 심령에 들어와 역사하는 것을 완전하게 믿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교역자가 사역을 위해 믿음을 가지는데, 믿음없이 (예수 그리스도가 심령에 없는 것처럼) 사역한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라는 것이다. 영을 살려야 하는데, 세상의 인본주의, 율법주의, 영지주의적인 사역을 한다면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역자는 주의 말씀을 심령 가운데, 듣고 그 믿음 가운데서 사역을 해야한다는 말이다.  초대교회 당시에도 영지주의가 만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라고 번역된 것의 원어는『메(없다) 티나타이(능히 할 수) 헤(그) 피스티스(믿음이) 소사이(구원하는 것을) 아우톤(그들)』이다. 그 믿음이 그들을 능히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이다. 호로고스가 없는 믿음은 그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이다. 2장 14절에서 야고보가 교역자에게 말하는 핵심은 두가지다. 사역을 위해 호로고스의 믿음을 가져야 하는데, 호로고스가 없는 믿음으로 무슨 사역을 하겠는가 라는 것이고, 호로고스가 없는 믿음은 자기를 구원하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2장 15-17절『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이 비유는 비록 세상에 있는 육신의 형제도 양식이 부족하면 도와주는데, 영적으로 교회 안의 형제들 간에 호로고스의 믿음과 영을 살리는 일에 관심없다면,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라는 것이다. 행함(사역)은 영을 살리는 일이다. 

2장 18절『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에르가)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피스틴)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에르가는 사역(영을 살리는 일)이다. 피스틴은 호로고스(예수 그리스도)가 있는 심령에 있는 믿음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행함으로 나오는 믿음을 의미한다. 행함으로 나오지 않는 그 믿음을 나에게 보여봐라는 것이다. 『나는 행함으로 나오는 그 믿음을 네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결국 어떤 믿음인가를 말하는 것이다. 

2장 19-20절『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텔레이스 데 그노나이)』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을 믿는 것은 교리적 지식적으로 믿는 하나님을 의미한다. 호로고스가 심령에 없는 하나님인 것이다. 귀신들도 하나님을 잘 알고 무서워한다. 심령에 호로고스가 없는 자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다. 이들의 믿음은 귀신들보다 못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텔레이스 데 그노나이』는 관계를 통해서 아는 것이다.(히브리어 야댜와 같은 개념) 그런데, 지식으로 아는 믿음은 허탄한 믿음이라는 것이다. 

2장 21절『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에르곤)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아브라함의 사역은 아들을 제단에 바치는 일이다. 영적으로 하나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예수 그리스도)를 제단에 바치는 것과 같은 모습이다. 그 사역은 죽었던 영을 살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이런 사역은 장차 오실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은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일이다. 오늘날 성도도 십자가에서 자기를 드리는 것이 되어야 하나님으로부터 의를 얻는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죽는 것이 바로 자기를 드리는 일이다. 그래서 자기를 드릴 때 호로고스가 그의 심령 안에 들어 오시고, 그 성도는 호로고스의 믿음으로 나가는 것이다. 

2장 22-24절『네가 보거니와 믿음(헤 피스티스)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헤 피스티스는 지식으로 믿는 믿음이 아니라, 심령에 호로고스가 들어와 호로고스를 통해, 영을 살리는 일에 사역하게 하는 믿음이다. 믿음은 호로고스를 통해서 사역(영을 살리는 것)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사역으로 이어지는 믿음이 아니면, 지식으로 아는 믿음이라는 것이다. 

2장 25절『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에르곤)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야고보가 기생 라합을 비유로 들은 것은 아브라함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과 동일 선상에 놓고 보는 것이다. 기생 라합이 행한 일은 가나안 사람들에게 대하여, 죽음을 각오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라합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행한 것이 바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로운 것이다. 

2장 26절『영혼(프뉴마토스)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프뉴마토스는 영(성령)을 의미한다. 성령이 함께 하지 않아 영이 죽어있는 몸을 의미한다. 행함(사역)이 없는 것은 영을 살리지 않는 사역(세상적인 사역)이며, 이 사역이 없는 믿음은 역시 영적으로 죽은 믿음이라는 것이다. 즉 호로고스의 믿음이 아니라 자기가 믿는 믿음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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