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갈라디아서 4장 1-11절)『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4장 1-2절『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네피오스)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그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나니』네피오스는 유아라는 의미도 있지만, 말을 못하는 자라는 의미가 있다. 아이의 의견은 무시한다는 것이다. 당시의 시회에서 어린 아이는 한 집안의 유업을 물려받을 상속자이지만, 후견인과 청지기를 두어서 마치 그들의 종과 같이 대했다는 것이다. 그만큼 교육과 훈련이 엄격했음을 보여준다. 

4장 3절『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네피오이)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 노릇 하였더니』네피오이는 하나님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그 의미를 알지 못하는 자들이다. 초등학문은 율법을 의미하며, 4장 2절의 후견인과 청지기와 같은 위치에 있다. 율법의 조문은 엄격하며, 마치 율법 아래 있는 백성을 종과 같이 엄격한 규율 속에 있게 한다. 

4장 4-5절『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텐 휘오데시안)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텐 휘오데시안은 아들이라는 지위를 의미한다. 속량은 신도들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지위를 얻게 하려 했다는 것이다. 종의 신분에서 아들의 신분으로 바뀌는 것이다. 종은 사탄의 종이며, 아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자들은 사탄의 종들이다. 그런데, 사탄의 종된 자가 속량되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속량은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의 피값을 지불하고, 그의 종들을 사는 개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대가를 지불하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므로 종이 아니라 아들의 명분이 되는 것이다. 죄의 종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위해서는 일단 종으로부터 벗어나야 하고(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양자로 입양되어(성령으로 새 피조물이 되고:거듭남) 아들의 명분을 얻는 것(성령세례를 받아 확정하는 것)이 된다. 아들의 명분을 얻기 위해서는 이른 비(구원의 성령)와 늦은 비(돕는 보혜사 성령)가 내려야 열매를 맺듯이 성령에 의해서, 양자로 되고, 아들의 명분을 얻게 된다. 

4장 6-7절『너희가 아들이므로(에스테 휘오이)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성령)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크라존)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에스테(be) 휘오이(son)는 바울의 말을 듣고 있는 사람이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의 정체성을 의미한다.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진 사람이 아들의 명분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크라존은 영어의 cry이다. 울부짖는다는 의미다. 아들의 영(성령)을 보내시어 울부짖게 한다는 것이다. 죄인이 죄의 그물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 회개하여 부르짖고, 예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하나님은 십자가의 은혜를 통하여, 그를 죄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고,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다시 환원시켜 주신다는 것이다. 성령이 임하시면, 기쁨의 눈물이 나오는 것이다. 이때 부르짖는 것은 회개의 부르짖음이 아니라, 감사의 부르짖음이다. 그동안 죄의 그물에 갇혔는데, 성령께서 오시고 구원해주셔서 감사하다는 것이다. 구원으로 이르는 길은 좁은 길이다. 그런데, 오늘날 값싼 복음(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을 전하므로, 감사의 부르짖음이 없는 구원의 모습이 되는 현실이다.  

4장 8절『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메 우신 데오이스) 종 노릇 하였더니』메 우신 데오이스는『있지도 않는 신들에게』라는 의미다. 이 말은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을 하지만,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도 모르고 하나님을 종교의 신으로 믿는 자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마치 출애굽한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 시내산에 이르러,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시내산에 갔을 때, 그가 산에 오래 머물므로, 백성들이 금 송아지를 만들어서 하나님이라고 한 것과 같은 이치인 것이다. 이러한 사례들은 교회 건물을 성전이라고 하고, 그 속에 십자가를 하나님으로 대신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4장 9절『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그논테스)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그노스텐테스)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율법)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그논테스나 그노스텐테스의 어근이 그노스(알다:히브리어의 야다)이다. 히브리어 야다는 부부관계를 통해서 알듯이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 서로 아는 것을 의미한다. 성도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게되는데, 왜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려고 하느냐 하는 것이다.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이 성령을 받고 하나님을 알았다고 하는데, 그들은 다시 율법적으로 돌아가는 것을 바울이 지적하는 것이다. 엄밀히 그들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닌 것이다. 여기에서 사용된 그논테스나 그노스텐테스라는 동사는 미완료동사로서 너희가 하나님을 이미 알았다 라는 의미가 아니라, 성도는 하나님을 아는 자라는 것을 의미한다. 성도의 정체성을 말하는 것이다. 바울이 말하는 대상으로, 그들이 하나님을 안다고 말을 하지만, 사실상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교회 안에서 이랬다 저랬다 하는 사람들은 구원의 시작부터 진행이 안된 사람들이라고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시작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을 의미한다. 물에서 죽어야 거듭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죽어야 함을 깨닫고 죽는 자가 바로 물에서 죽은 자라는 것이다. 죽어야 할 의미를 모르는 자는 거듭나야 한다는 의미조차 모르는 것이다. 

4장 10-11절『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그들이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 "날"이다. 이 날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스스로 율법을 지켜서 안식하는 것은 포기하고 예수 그리스도 속으로 들어가면 안식이 되는 것이다. 

달은 월삭을 말하는데, 동양에서 말하는 음력과 비슷하지만 매월마다 이름이 따로 있는데, 매월 마다 첫날이 월삭인데, 그 월삭에는 안식일 처럼 아무 일도 하지 않고,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는 날이었다. 이 월삭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해결하신 것이다. 

해를 지키는 것은 안식년, 희년이 있다. 안식년은 일곱번째 되는 해를 지키는데, 땅이 없는 자를 위해서 수확을 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희년은 안식년을 일곱번 한 후 오십번째 되는 해는 모든 것을 다 시 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안식년과 희년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신 것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로 돌아가게 된 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예수님이 다 이루셨다고 하는데,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는 예수님이 이루신 것을 믿지 않는 것이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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