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갈라디아서 6장 10-18절)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

6장 10절『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아가도스)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칼론은 가치있는 일을 하는 것이고, 아가돈은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말 번역은 둘다 선한 일이라고 번역되었다. 아가도스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돕는 것을 의미한다. 믿음의 가정이라도 거듭나지 못하면 믿음이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6장 11-12절『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티오콘타이)를 면하려 함뿐이라』 큰 글자의 의미는 대단히 중요하다는 의미로 표현되었다. 육체의 모양을 내는 것은 할례를 의미한다. 그 당시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믿지만, 부활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견해가 많았다. 그래서 오히려 할례에 더 추구하게 되었다. 티오콘타이는 박해가 아니라 추구하다 라는 의미다. 할례를 받고,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역으로 추구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의미가 없으면, 할례나 세례나 형식적인 의례에 불과한 것이다. 오늘날 세례는 어떤가? 구원을 얻었다는 표시로 세례를 생각하는 사람들은 할례받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할례를 받는 의미는 씨의 약속인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의식이다. 세례는 나는 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죽고, 말씀이신 호 로고스가 육신 속의 심령 가운데, 들어오는 의식인 것이다. 이것을 믿는 자가 거듭난 자이고, 성령세례로 이어진다. 

6장 13절『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할례가 율법의 하나인데, 할례받는 것이 구원받는 도구로 생각하여, 율법도 지키지 않고, 또 구원받았다고 자랑도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할례의 본질도 모르는 것이다. 

교회사람들이 일반적으로 할례에 대해서 생각하기를 할례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거룩한 백성, 하나님의 택한 백성임을 나타나게 하기 위해서 육체에 표시를 하는 것이다 라고 한다. 온전한 설명이 될 수 없다. 그러나 할례를 통해서 율법과 복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위하여 무엇을 하셨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이 왜 할례를 받지 않으면 백성 중에서 끊어진다고 하셨는가? 창세기 17장 1-14절에서『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언약을 하셨다. 심히 번성하게 되리니 언약을 지키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해 주신다고 하니 아브람이 할 것은 없다. 단지 자손이 대대로 할례를 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영원한 언약이다. 하나님의 언약은 단 한가지이다. 영원한 언약을 창세기 17장 19절에서 다시 언급하고 있다.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같은 영원한 언약을 하고 있다. 어떤 언약인가 하면 창세기 26장 2-4절에서 자손인 씨의 약속을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약속을 이삭에게만 한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에게 모리야 산에서 약속을 한 바 있다. 그런데 씨의 약속은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범죄하자마자 창세기 3장 15절에서 하나님이 여인의 후손인 씨에 대한 약속을 하셨던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받으라 라고 하시는데, 그 의식 속에는 하나님의 씨에 대한 언약이 있는 것이다. 결국 영원한 언약은『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구원을 얻겠다』인 것이다. 씨의 약속이 할례 의식에 들어있는 것이다. 창세기 17장 13절에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내 언약이 네 살(생식기)에 있어』라고 하셨다. 생식기는 씨를 생산한다. 그 생식기인 살에 약속을 두고 할례를 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내가 하나님의 그 약속을 믿는다』라고 하는 증표이다. 씨로 말미암아 장차 구원받게 될 것을 믿는 것이다. 그 약속의 씨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 라고 사도바울은 말을 했다. 할례를 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씨의 약속, 즉『예수 그리스로 말미암아 장차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는 것을 믿는다』라는 고백이며 표시이다. 하나님이『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겠다』라는 말의 전제는 아직은 너희들이 내 백성이 아니라는 말이다.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씨의 약속이 있어서 구원을 받을 것을 믿는 것인데, 할례를 받지 않으면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는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는 것이며, 그 결과 백성 중에서 끊어지게 되고, 하나님의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마음의 할례를 깨달아야 한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에 들여 보내면서 마음의 할례를 신명기에서 말하고 있다. 사도바울도 마음의 할례를 말하고 있다. 할례는 내가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다 라는 것을 육체에 새기는 것인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것을 믿는다 라는 것을 마음에 새기라는 것이다. 예레미야도 새 언약을 말한다. 새 언약은 시내산에서 세운 옛 언약과 같지 않다 라고 말한다. 옛 언약은 돌판의 십계명(율법)에 있지만 새 언약은 마음에 새긴다고 했다. 하나님이 믿는 자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 가운데 있는 인간을 구하신다는 것을 마음에 새긴다는 것이 마음의 할례인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할례를 받아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할례를 통하여 씨의 약속인 그리스도께서 나를 죄 가운데서 구원해 주신다는 약속을 마음에 새긴다는 것이다. 육체에게는 표증로, 마음으로는 하나님께서 마음의 할례를 통해 새기신다는 것이다. 

6장 14절『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엔 토 스타우로 투 퀴리우)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바울이 십자가의 본질을 설명한다.『엔 토 스타우로 투 퀴리우』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라는 말이다. 왜 예수와 못박히는 것이 세상에 대해서도 못박히는가? 그 이유는 못박히는 주체가 육의 몸(탐욕:옛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옛사람은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자기의 의를 말한다. 자기의 의는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이루어보고 싶어한다. 

6장 15절『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종교적인 의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오직 거듭남이 구원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이전에는 내가 주인이었는데, 새로운 피조물이 되면 호 로고스가 심령 안에서 주인으로 되는 것이다. 

6장 16절『무릇 이 규례(토 카노니)를 행하는(스토이케수신)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카 노니는 표준을 의미하며, 성령을 가리킨다. 즉 토라(율법)이 표준이 아니라 성령이 표준이라는 의미다. 스토이케수신은 ~와 함께 걸어간다는 의미다. 표준이 되는 성령과 함께 걸어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스라엘은 영적 이스라엘 즉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를 의미한다. 

6장 17절『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스티그마타)을 지니고 있노라』스티그마타는 복수 명사로서 흔적들이다. 그것은 성령의 열매를 의미한다. 

6장 18절『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투프뉴마토스)에 있을지어다 아멘』투 프뉴마토스는 심령이 아니라, 성령과 함께 라는 의미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혼과 영과 골수를 쪼개기까지 하며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