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갈라디아서 3장 1-14절)『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3장 1절『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같 오프달무스) 밝히 보이거늘(프로에그라페) 누가 너희를 꾀더냐』바울은 다른 복음(율법주의)을 붙잡는 사람들에게 어리섞도다 라고 말을 한다. 같 오프달무스는 눈들 앞에(많은 사람들) 라는 의미이고, 프로에그라페는 프로(~앞에)와 에그라페(기록되다)의 합성어다. 너희들 눈 앞에 기록되었듯이 분명한 체험으로 보이지 않느냐 라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이 성도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분명히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체험을 했음에도 갈라이다 교회 사람들이 율법주의에 빠져있는 것이다.
3장 2절『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마데인)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에르곤 노무)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아코에스 피스테오스)』마데인은 들어서 아는 것을 의미한다. 즉 너희가 배우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에르곤 노무는 율법의 사역을 의미한다. 아코에스 피스테오스를 『듣고 믿음』으로 라고 번역했으나, 『믿음의 들음』이다. 문법적 형식이 에르곤 노무와 같은 소유격이다. 율법에서 그 사역(율법대로 사역하는 것)이 핵심이듯이, 믿음의 들음에서 중요한 것은 들음(아코에스)이다. 아코에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다. 내가 예수를 믿는다 라고 하므로 성령을 받는 것이 아니라, 믿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성령을 받는다 라는 것이다.
3장 3절『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시작은 성령으로 거듭난다고 믿지만, 결국 율법주의로 끝난다는 것이다. 엄밀히 이들은 성령으로 거듭난 자가 아니라는 의미를 갖는다. 성령으로 거듭난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에 대한 확증의 선물을 받는 자다.
3장 4절『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에파데테)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에파데테는 수난, 열정이라 번역된다. 믿음을 하나님으로부터 얻기 위해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열정(힘든 과정)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어려운 과정이 헛된 것인가 라는 것이다. 율법주의자들은 이런 과정을 무시하고 헛된 것처럼 생각하는 자들이다.
3장 5절『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아코에스 피스테오스)』 아코에스 피스테오스는 믿음의 들음이다. 여기에는 성령세례를 받은 자들에게 나타나는 능력을 말하고 있다. 성령세례를 받은 자들은 기도와 간구로 계속 성령 충만을 받게 된다. 이 능력이 율법의 사역으로냐 아니면, 믿음의 들음에서냐 라는 것이다.
3장 6절『아브라함이 하나님(토 데오)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토 데오는 문법적으로 하나님에게 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신앙의 목적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이것은 객관적인 믿음이다. 그러나 신앙의 목적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는 것이다. 이것은 주관적인 믿음이다. 믿음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하여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의를 주신다. 믿음은 관계(히브리어:야댜)인 것이다.
3장 7절『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에크 피스테오스)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줄 알지어다』에크 피스테오스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이 아니라, 믿음에 속한 이라는 의미다. 믿음에 속한 자는 율법주의가 아니라, 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하는 믿음을 가진 자를 의미한다. 그래서 성령으로 거듭나고, 성령세례를 받는 자를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성령으로 거듭나 새로운 피조물이 된 자에게 축하로 성령세례를 주신다. 거듭남과 성령세례는 동시에 이루어진다. 형식적 물세례를 받는 자가 거듭난 것이 아니라, 물에서 죽고, 다시 태어남을 깨닫고 믿는 자가 거듭나는 것이다.
3장 8절『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프로이두사)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엔 소이)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프로이두사는 미리 보여준다는 것이다. 엔 소이는 너로 말미암아가 아니라『네 안에서』이다. 의미상으로는 구원은 아브라함으로 인하여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복을 받는 것이다.『네 안』이라는 말은 『네 씨로 인하여』라는 말이 되는 것이다. 번역이 자연스럽지 못하다. 이것을 다시 번역하면, 『성경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으로 인하여 천하만민이(이방인들)이 구원받을 것을 말씀하셨는데, 그래서 아브라함과의 약속으로 인하여, 네 씨(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복(구원)을 얻을 것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3장 9절『그러므로 믿음(피스테오스)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토 피스토)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피스테오스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고, 토 피스테오스는 아브라함이 씨로 인하여 천하만민이 복을 받게 될 것을 믿는 믿음이다.
3장 10절『무릇 율법 행위(에르곤)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에르곤은 사역을 의미한다. 율법주의자들은 율법을 완전히 지켜서 의를 이루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율법의 하나라도 못지키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 세상에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있는 자는 없다. 그래서 율법주의자들은 죄인들이라는 것이다.
3장 11절『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에크 피스테오스) 살리라(제세타이) 하였음이라』 에크 피스테오스는『믿음에서 나온』으로 번역된다. 즉 믿음에서 나온 의인은 자기 삶을 살 것(제세타이)이다
3장 12절『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엔 아우토이스) 살리라 하였느니라』 율법을 행하는 자는 율법을 완벽하게 지켜야 하나 지키지 못하므로 그것을 깨닫는 자는 율법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발견하고 그것으로 인해서 살게 되는 것이다. 엔 아우토이스는 율법 가운데 숨겨져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의미한다. 율법을 못지키면, 동물을 죽여서 희생제사를 드렸다. 그 희생제사를 통해서, 장차 오실 그리스도(여인의 후손)를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3장 13절『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엨세고라센)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속량으로 번역된 원어는 엨세고라센이다. 피값을 주고 사는 개념이다. 죄의 노예를 값을 주고(사탄에게) 사는 것이다. 그래서 자유를 주는 것이다.
3장 14절『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아브라함의 복이 천하만민에게 미치는 것은 아브라함의 씨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믿음(예수와 함께 죽고)을 통해서, 성령을 받는 것(예수와 함께 부활하는 것)이다.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