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빌립보서 3장 12-21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3장 12절『내가 이미 얻었다(엘라본)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테텔레이오마이)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카탈라보) 된 그것을 잡으려고(카텔렘프덴) 달려가노라』
엘라본은 받았다는 의미이고, 테텔레이오마이는 온전하게 되다 라는 의미다. 앞의 문장은 부활을 받거나 온전하게 되지 않았다는 것이고, 뒤의 문장에서『카타라보』는 카타(~을 따라서)와 람바노(받다)의 합성어다. 그리스도를 따라 부활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카텔렘프덴』은 붙잡으려고 가는 것이 아니라, 붙잡혀졌다는 말이다. 그리고 붙잡힌 것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달려간다는 것이다. 부활을 온전히 받지 않았다는 말은 거듭났으나, 어린아이의 상태에 머물고 있는 것을 의미하며, 예수에게 붙잡혀 부활을 받는 것은 아들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죄인이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께 나아갈 때, 죄인은 죄로부터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로 칭함을 받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아들과 다른 어린아이에 불과한 것이다. 아이는 하나님의 음성도 들을 수 없으며,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모른다. 그러나 아들은 하늘의 사역을 할 수 있으며, 하늘의 열쇠를 갖지만, 자녀는 어린아이와 같은 상태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예수와 함께 죽고 다시 태어나는 것을 믿는 성도에게는새생명으로 다시 태어나게 해 주신다. 그리고 하나님이 거듭난 자에게 성령세례를 주시고 성령 충만을 주신다. 그런데, 성령 충만을 받은 성도들이 생활 속에서 여러가지 염려와 세상적 갈등 속에서, 성령이 떠나가는 일들이 나타난다. 다시 기도로서 성령 충만을 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성령세례와 성령 충만은 성도의 심령 속에서 호 로고스와 만날 수 있는 중요한 기회가 되는 것이다.
거듭난 자가 성령 충만을 받아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면, 호 로고스께서도 성도의 심령 속으로 들어오시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으로 아들이 되는 것이다. 순간 성도 역시 부활을 받게 되는 것이다. 부활은 영의 몸과 같은 성전을 이룬다. 그래서 심령 속의 성전에서 호 로고스와 제사장이 된 성도가 만나서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바울이 잡으려 하는 것이 바로 이 부활이다. 부활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은 후에 부활하심과 그리스도 안에 있지 못한 자가 육체가 죽은 후에 부활하는 것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가 현재적 부활을 하는 것으로 나눌 수 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성도의 심령 가운데 호 로고스로 임재하신다. 하나님께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땅에 있는 모든 자들이 무릎을 꿇게 하는 권세(권능)를 주셨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도 역시 이 부활의 권능을 받게 된다.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부활의 신앙이다. 예수님도 로마서 1장 4절에서 부활하신 후에 아들로 선포되신 것이다.『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라』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도 아들로 선포되는 것이 바로 부활되는 것이다.
3장 13절『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바울은 부활의 능력에 붙잡혔지만, 아직 붙잡히지 않았다고 겸손히 말하고 있다. 그래서 이전의 것은 잊어버리고 다시 부활을 붙잡으려고 달려간다고 말을 한다. 성도 역시 현재적 부활이 이루어지더라도, 바울과 같이 부활을 향해서 달려가는 마음으로 살아라는 것이다.
3장 14절『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콜레세오스)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푯대가 부활로 나아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는 자는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나아가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는 자는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가 주인이 되는 삶이다. 콜레세오스는 영어의 calling이다. 하나님이 calling하는 것은 아들이 되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성도를 아들로 부르고 있는 것이다. 이게 상이라는 것이다.
3장 15-16절『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텔레이오이)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스토이케인)』 텔레이오이는 3장 14절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일이 이루어진 사람을 의미한다. 즉 부활에 이르러 아들이 되는 자를 의미하는 것이다. 성도가 어느 단계에 이르렀던지, 부활에 이르도록 아들이 되는 자가 되라는 것이다. 성도는 어느 단계에 있던지 푯대를 향하여 날마다 걸어가야만 한다. 스토이케인은 걸어가다라는 의미다. 이것은 신학에서 말하는 성화와는 다른 개념인 것이다.
3장 17절『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부활에 이르도록 본받으라는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에게 붙잡혀 부활에 이르렀지만, 겸손하게 아직 부활을 향해서 나아간다고 말을 했다. 그래서 자기를 본받으라고 말한다.
3장 18절『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페리파투신)』페리파투신은 걸어가다라는 의미다. 십자가의 원수로 갈어가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걸어가야 하는데, 자기의 생각대로 자기가 주인이 되어서 걸어가는 것이다. 어린아이의 신앙을 가진 자는 자기 생각대로 행동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동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교회 안에서 예수를 믿으면서 율법주의, 인본주의, 영지주의도 믿는 자들인 것이다. 현재적 부활이 없는 자들은 모두 십자가의 원수가 되는 것이다.
3장 19절『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잘못된 신앙관을 가지고 있는 자들의 결말을 말하고 있다. 그들은 하늘을 생각하는 자가 아니라,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배를 채우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3장 20절『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우라노이스)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관사가 없는 복수 하늘인 우라노이스는 교회 공동체를 의미한다. 교회 공동체는 성도들이 모인 공동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성도는 심령 속에서 임재하시는 호 로고스를 간절히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부활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이다. 바울이 교회 공동체를 언급한 이유는 코이노니아(복음의 사역)때문이다. 복음의 사역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것이다.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는 교회 공동체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교회 공동체는 같은 건물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고, 선교사와 협력한다든가 하는 방법 등 여러가지 방법으로도 이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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