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은 주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이고
유대인은 주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이고
(데살로니가전서 2장 11-20절)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너희 각 사람에게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노니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라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형제들아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은 자 되었으니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너희도 너희 동족에게서 동일한 고난을 받았느니라 유대인은 주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이고 우리를 쫓아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게 대적이 되어 우리가 이방인에게 말하여 구원받게 함을 그들이 금하여 자기 죄를 항상 채우매 노하심이 끝까지 그들에게 임하였느니라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그러므로 나 바울은 한번 두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탄이 우리를 막았도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2장 11절『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너희 각 사람에게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노니』바울의 마음은 부모가 자식에게 말하는 듯이 성령 안에서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한다고 말을 한다. 성령의 역할에 대해서 우리는 깨달아야만 한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성령을 기다리라고 말씀했다. 성령이 오시면, 죄와 의와 심판에 심판에 대해서 책망하신다고 말했다. 죄는 호 로고스의 말씀을 믿지 않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어기는 것을 죄로 여겼지만, 신약시대는 호 로고스의 말씀을 믿지 않는 것이 죄라는 것이다. 의에 대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세상 죄를 지고 성부 하나님께 가셨는데, 그것이 성도들에게 의가 된다. 그래서 죄로부터 벗어난 성도의 심령 속에 성전이 임하시고, 호 로고스가 임재하는 것이다. 심판은 성도의 심령 가운데, 있던 사탄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심판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탄의 종이 아니라, 이제 호 로고스의 종이 되었다는 것이다.
2장 12절『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라』성령이 각 성도에게 권면하는 이유는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이 성도를 부르신 이유는 바로 이와 같은 이유에서다. 그래서 그것을 깨닫고 복음을 전파하여, 각 사람들도 호 로고스의 사람이 되도록 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2장 13절『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로곤 아코에스 파르 헤몬 투 데우)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여기에서,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부분의 헬라어를 보면,『로곤 아코에스 파르 헤몬 투 데우』이다. 성도의 심령 속에 임재하신 호 로고스께서 말씀하시는데,『호 로고스의 말씀을 듣고, 성도가 우리 옆에서 그 말씀을 받을 때』라는 의미다. 성도가 심령 속에 임재하신 호 로고스의 말씀을 받으라는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말씀은 성경 책에 기록된 말씀을 의미한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말씀은 심령 속에서 임재하시는 호 로고스의 말씀이다. 우리 옆이라는 말은 호 로고스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바울과 실루아노를 의미한다. 히포모네를 어떻게 할 수 있는가를 사도바울을 통해서 그들이 배우게 된다는 말이다. 예배 중에 목사가 설교를 하면, 신도들은 대개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각하지만, 여기서는 심령 중에 임재하신 호 로고스의 말씀을 직접 들으라는 것이다. 그 방법은 우리(사도바울 등)에게 배우라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그들에게 권면하는 말은 사람의 말이 아니라, 바울도 히포모네를 통해서 호 로고스께서 하신 말씀이라는 것이다.
2장 14절『형제들아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은 자 되었으니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너희도 너희 동족에게서 동일한 고난을 받았느니라』 유대에 있는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다. 그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 안에 있는 유대인 그리스도인으로부터 많은 핍박을 받은 것이다. 데살로니가 교회도 교회 안의 자기 동족으로 핍박을 받았다. 이 말은 율법주의가 복음을 공격한다는 말이다. 초대 교회 당시 교회 안에는 복음과 율법주의가 혼재되어 있었다는 말이다. 어떤 자들은 복음을 받아드리지만, 율법도 지켜야 한다는 율법주의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는 베드로와 야고보가 사역을 잘하므로서 복음의 본이 되는 교회가 되었다는 말이다. 데살로니가 교회도 그렇게 되라는 말이다.
2장 15-16절『유대인은 주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이고 우리를 쫓아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게 대적이 되어 우리가 이방인에게 말하여 구원받게 함을 그들이 금하여 자기 죄를 항상 채우매 노하심이 끝까지 그들에게 임하였느니라』율법주의자들이 왜 그렇게 하는가? 그 이유는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성경책을 통하여 하나님과 그 말씀을 이해했기 때문에 온전한 믿음에 아르지 못한 것이다. 오늘날 교회도 주의 음성을 듣는 자와 듣지 못하는 자로 나뉘어 진다. 주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사람들은 율법주의로 갈 수 밖에 없게 된다.
2장 17-18절『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그러므로 나 바울은 한번 두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탄이 우리를 막았도다』사탄은 이렇게 하나님의 사람들의 사역을 방해한다. 예수님도 십자가의 사역을 앞두고 사탄의 방해를 받았다. 사탄이 예수님의 생각 속으로 잔을 피하게 했으면 좋겠다고 스쳐 지나가게 한 것이다.
2장 19-20절『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강림한다는 말은 영어로는『he is coming』으로 마치 재림하시는 예수를 연상한다. 그러나 헬라어 원문은『파루시아』로서 파라(옆에)와 루시아(있는 것)의 결합된 단어다. 성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를 의미하는 것이다. 파루시아는 임마누엘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다. 주님의 임재 앞에 있는 것이 소망이 되고, 기쁨과 자랑이 된다. 3장 13절의 강림한다는 말도 같은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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