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고린도전서 3장 1-15절)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3장 1-2절『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프뉴마티코이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사르키노이스)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네피오이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프뉴마티코이스는 영적인 사람들이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자들을 의미한다. 사르키노이스는 종교심으로 신앙을 지키는 자들이다. 네피오이스는 젖먹는 아기를 의미하며, 바울은 종교적 신앙을 가진 자들을 젖먹는 아기로 표현했다. 젖먹는 아기는 호 로고스의 신앙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을 대한다는 것이다. 부모의 심정으로 아기를 대한다는 것이다. 

3장 3절『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어린 아이같은 신앙에 대해서 바울은 분쟁을 예로 들었다. 교회에서도 종파를 나누는 것도 바로 이와 같은 원리다. 종교심으로 내가 옳으니 하면서 주장하는 것이 바로 이런 유형이다. 

3장 4-5절『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육의 사람이 아니리요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교회 안에서 바울파, 아볼로 파로 나누어진 것을 보고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아주 질이 낮은 종교행위에 대해서 지적을 하는 것이다. 바울과 아볼로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학 위한 사역자일 뿐이라고 말한다. 

3장 6-9절『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텃밭에 농작물을 심는다. 땅을 파고 씨앗을 뿌리고 흙으로 덮을 때면 씨앗의 여린 싹이 두터운 흙을 뚫고 올라올 수 있을까 염려가 된다. 농부는 씨앗을 심기는 하지만 씨앗으로 하여금 싹을 틔워 땅을 뚫고 올라오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간이 흐른 어느 날 씨앗은 땅을 뚫고 싹을 내어놓는다. 인간의 눈으로 모두 볼 수는 없지만 땅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다. 땅위로 솟은 어린 싹이 과연 잘 자랄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기도 하지만, 경험이 많은 농부라면 만물이 어린싹이 자라도록 돕고 있음을 안다.

저 높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은 때로는 얼마나 굵은지 모른다. 가속도까지 붙어 땅에 이르면 어린 싹이며 잎을 상하게 할 법도 한데 비는 싹을 해하지 않고 뿌리와 잎에 새 힘을 더한다. 저 멀리서 비춰오는 태양은 세상을 밝힐 뿐만 아니라 어린 싹의 몸통과 줄기를 자라게 한다. 아침과 밤의 리듬 속에서 농작물은 생기를 얻기도 하고 쉼을 누리기도 하면서 조금씩 자라난다. 씨를 뿌리고 물을 주며 농작물의 성장을 지켜본 농부는 한 가지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된다. 농부가 스스로 농작물을 한뼘이라도 자라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농부는 하나님의 질서를 따르는 만물이 그의 뜻을 따라 순환하고 운행하며 생명을 자라게 하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므로 작은 텃밭을 가꾸는 농부일지라도, 생명을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는 은총을 누릴 수 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작은 생명으로 하여금 움트고 자라고 결실하게 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알게 되는 것이다.

바울은 바울파와 아볼로파로 나뉘어 시기와 분쟁을 일삼는 고린도교회 사람들에게 텃밭의 비유를 들었다. 아직 어린아이와 같은 고린도교회 사람들은 생명을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한다. 그들이 아직 종교심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신앙생활을 성경 지식으로 듣고 배우고 믿고 살아가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심령 속에서 임재하시는 호 로고스를 깨닫지 못하는 자들인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바울과 아볼로는 확실하고도 선명한 존재다. 보이지 않아 가늠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을 따르는 일은 막연하지만, 눈에 보이는 사람을 따르는 일은 안정감을 준다. 보이지 않는 진리를 믿는 것보다 보이는 현상을 따르는 것이 쉽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일보다 보이는 우상을 섬기는 일이 쉽다. 성도의 심령 속에서 임재하신 호 로고스의 말씀보다 유명한 신학자가 말한 교리를 더 신뢰하고 따른다면 정말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을 가진 것이라고 말을 할 수 있다. 

3장 10-11절『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터를 닦은 것이다. 복음은 사람들의 심령에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심는 것이다. 이외의 것을 전하면 복음이 아닌 것이다. 

3장 12-13절『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 사람의 공적(토 에르곤)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토 에르곤은 사역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터 위에 불에 타지 않는 것을 세워야 함을 말하고 있다. 그 사역들이 불에 타지 않는 그리스도의 터 위에 잘 서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도가 그리스도의 복음 사역을 열심히 했는데, 그 사역이 마치 불에 타버리는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되었다면, 다 무너지게 될 것이다. 

3장 14절『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제미오데세타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제미오데세타이는 상처를 받는다 라는 의미다. 신도가 열심히 한 사역이 마치 나무나 풀이나 짚처럼 불에 타버린다면, 많은 상처를 입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는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 신도가 하나님의 사역을 제대로 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혼과 영과 골수를 쪼개기까지 하며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