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히브리서 10장 1-10절)『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 하셨으니 그 첫째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10장 1절『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율법은 옛언약이다. 율법 속에는 제사법과 행위법이 있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율법은 제사를 드리는 율법을 의미한다. 제사법을 통해서 제사장들이 하나님께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백성들은 제사법을 통해, 제사장이 완전하지 못한 것을 깨달음과 동시에, 백성들 자신이 날마다 드리는 제사를 통해서는 하나님께 완전히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라는 것이다. 그래서 약속의 씨를 통해서 온전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깨달았어야만 했는데, 백성들은 그렇게 되지 못한 것이다.
새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아론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 아니라,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단번에 영원한 제사를 드리는 새언약이 바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인 것이다. 오늘날 교회의 문제는 구약시대에 제사법에 의한 제사를 드리지만, 행위법(도덕법)에 관심을 집중한 것 처럼, 행위법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이다. 즉 복음을 따르지만 율법주의로서 계명도 지켜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래서 복음만이 진리의 길인데, 복음과 율법주의를 섞는 다른 복음이 되는 것이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성령훼방죄를 짓는 것이다. 자기도 구원받지 못하고, 남도 구원에 이르지 못하도록 방해하기 때문이다. 대체로 교역자들이 중보자 대제사장 역할을 하려고 한다면, 바로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다.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법이고, 복음은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성령의 법이다.
10장 2절『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하게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제사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섬기는 자들은 구약의 제사장들이다. 제사장들이 스스로 부정하므로 먼저 제사를 드렸는데, 그 제사가 온전했다면, 다시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지 않았는냐 라는 것이다. 아론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으로는 온전하지 못하다는 말이다.
10장 3절『그러나 이 제사들에는 해마다 죄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죄인이 제사를 드릴 때마다 죄인임을 기억하고 있지만, 동물의 피는 그 죄를 온전히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일 뿐 아니라, 죄를 대속하는 피인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는 자는 그 피를 힘입어, 온전히 죄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대속은 값을 지불하는 의미를 갖는다. 율법의 조항 한 하나를 통해서 죄를 용서받았으니 마느니 라는 그런 개념이 아니라, 사탄의 속박아래 있던 자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그런 개념인 것이다. 그래서 죄인은 먼저 자신이 하나님께 죽을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죽은 자가 되었음을 믿으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다시는 하나님이 그의 죄를 기억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죄가 기억날 때마다, 율법의 조항을 기억하여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는 그런 것을 하지 말고, 자신이 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죽은 자임을 기억하며, 날마다 십자가를 붙드는 자가 되어야 한다.
10장 5절『그러므로 주께서 세상에 임하실 때에 이르시되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구약시대는 제사를 드리는 곳이 예루살렘 성전 뿐이었다. 하루에 드리는 제사도 시간상 한정되어, 죄인들도 제사를 드리고 싶어도 다 드리지 못하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제사드리는 곳이 더 많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제사를 통해서 그들이 죄인임을 알려주실 뿐, 더 많은 제사와 제물을 원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오늘날 수많은 교회 사람들이 교회건물을 성전이라고 생각해서, 성전을 계속 지어서 확장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때, 성전의 의미는 죄를 용서받기 위해 제사를 드리는 곳이 되는 것이다. 이제 교회는 죄를 용서받기 위해 모이는 그런 곳이 아니라,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자가, 성령으로 거듭나서, 그들이 모여 그들의 심령에 임재하신 호 로고스를 함께 찬양하며, 그 분의 말씀을 듣고, 서로 교제하는 것이다.
10장 6절『번제와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백성들이 동물들의 피로 드리는 제사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인간의 죄의 문제를 완전하게 해결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제사를 드리지만, 그들 마음 속에 있는 죄성(원죄)이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죄인들은 율법을 통해서 계명을 어기는 것을 죄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사를 드리면, 그 죄를 용서를 받는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계명을 어기기 전 단계인 탐심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오늘날 교회는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것을 죄로 여긴다. 그러나 죄의 근원은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서 선악과를 바라보는 탐심의 마음이다. 보기에 탐스럽고, 먹음직하다는 것이다. 죄의 근원은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마음이다. 하나님은 제사를 통해서 그 원죄를 발견하고, 여인의 후손인 약속의 씨를 발견하라고 하시는데, 거의 대부분 그 약속의 씨를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10장 7절『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느니라 위에 말씀하시기를 주께서는 제사와 예물과 번제와 속죄제는 원하지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여기서 내가 라고 하는 1인칭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주라고 번역된 주는 성부 하나님을 의미한다. 예수님이 성부 하나님께 말씀하고 있는 내용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다는 말은 죄의 문제를 온전히 해결하러 왔다는 것이다. 동물의 피가 아니라, 단번에 십자가에서 드리는 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겠다는 것이다.
10장 9절『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째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 첫째 것은 제사장이 드리는 제사를 폐한다는 것이다. 교회 건물이 제사를 드리는 성전이 아니라는 것이다. 많은 교회들은 예배라는 말로 성전의 의미를 왜곡시킨다. 원래 성전은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 말씀을 듣는 자리인데, 그들은 제사를 드리고 있으면서(죄를 용서받기 위해 예수의 피를 요구하는 행위), 제사를 폐하고 예배만 드린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둘째 것은 말씀이신 호 로고스(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호 로고스를 세운다는 말은 성도의 심령 가운데, 임재하시는 호 로고스인 것이다.
10장 10절『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는 단번에 거룩한 자가 되는 것이다. 어떤 노력이나 행위로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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