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후서 5장 1-11절)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이렇게 입음은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소마토스)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우리는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들을 권면하거니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어졌으니 또 너희의 양심에도 알리어지기를 바라노라 』
5장 1절『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스케누스)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스케누스는 육체를 의미하지만, 죄가 거하는 집이라는 의미다. 로마서에서는 옛사람으로 표현되고, 고린도전서에서는 육의 몸으로 표현되었다. 이 옛사람이 무너져야만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인 새사람, 영의 몸을 입는다 라는 것이다.
5장 2절『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탄식하는 이유는 죄의 몸인 옛사람이 무너지지 않기에 탄식하는 것이다.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가 바로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며, 성도가 입기를 원하는 영의 몸이다. 영의 몸은 그리스도의 옷, 의의 옷이라고도 표현된다. 예수님이 부활했을 때의 모습이다. 성도가 거듭나면 이런 몸을 입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옷을 입는 것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며, 주님이 성도의 심령 속으로 들어오고, 성도의 영이 주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옷으로 덧입기 위해서는 반드시 육의 몸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과 연합되어 죽어야만 하는 것이다.
5장 3절『이렇게 입음은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벗은 것은 영이 벌거벗은 상태가 된다. 벌거벗은 자들은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져, 영이 죽어있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후에 벌거벗은 상태가 된 것을 알 수 있다.
5장 4절『참으로 이 장막(스케네이)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스케네이는 죄의 몸(육의 몸)이다. 탄식하고 있는 것은 육의 몸이 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죄의 몸을 벗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영의 몸을 죄의 몸 위에 덧입는 것이다. 죄의 몸이 감추어지는 것이다. 죄의 몸(죽을 것)이 영의 몸(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는 것이다. 삼킨 바 되는 것은 죄의 몸(작은 물고기)가 영의 몸(큰 물고기)에 의해 삼켜져서 보이지 않는 것과 같은 표현이다. 죄의 몸을 벗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스스로 자기의 의를 드러내려고 하는 몸부림에 불과하다.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은 바로 이런 의미를 갖는다. 기독교의 본질은 죄와 싸워서 이기려고 노력하는 종교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서 하늘의 생명을 덧입는 종교다.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기독교의 가장 핵심인 것이다.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과 함께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게 전제조건이다.
5장 5절『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아르라보나)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아르라보나는 보증금이다. 죄의 몸 위에 하늘로부터 오는 영의 몸을 덧입는 것이 구원인데, 하나님이 보증하시는 방법은 성령을 주신다고 한다. 성령세례를 받은 자는 죄의 몸이 그리스도의 옷으로 덮혀지는 것이다.
5장 6절『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다르룬테스) 몸(소마티)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줄을 아노니』다르룬테스는 용기있다는 표현이다. 그 용기는 하나님 앞에 나가는 용기다.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가지 못하는 이유는 신도 스스로가 죄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다 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죄로부터 자유함을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나가지 못하는 것이다.
소마티는 육의 몸이다. 육의 몸으로 있으면,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육의 몸을 벗고, 영의 몸을 입어서 하나님께 나가라는 말씀이다. 임마누엘은 주님이 함께 하시는 몸이다. 임마누엘의 몸이 되기 위해서는 성도의 심령 속에 호 로고스께서 임재하심을 믿고, 그 분 안으로 들어가서 만나고 대화하는 것이다. 임마누엘이 되기 위해서는 성령세례를 보증으로 받아야만 한다.
5장 7절『이는 우리가 믿음으로(디아 피스테오스)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디아 피스테오스는 믿음을 통하여 라는 말이다. 여기에서 믿음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믿음이다.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자는 믿음으로 주님께 담대히 나아간다는 것이다.
5장 8절『우리가 담대하여(다르루멘) 원하는(유도쿠멘) 바는 차라리 몸(소마토스)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다르루멘은 용기가 있다는 표현이다. 유도쿠멘은 기쁘게 생각한다는 의미다. 소마토스는 육의 몸이다. 육의 몸을 벗고 영의 몸을 입고 주님께 담대히 나아가는 것이다. 다시 표현해보면, 우리가 용기를 내어 육의 몸을 벗고 주님과 하나가 되는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5장 9절『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엔데문테스) 떠나든지(엨데문테스)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엔데문테스는 주님과 함께 있든지 라는 표현이고, 엨데문테스는 죄의 몸으로부터 떠나든지 라는 표현이다.
5장 10절『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소마토스)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 그래서 성령세례를 받지 않고 육의 몸으로 사는 자, 곧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은 자들은 둘째 사망에 처해질 것이다.
5장 11절『우리는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들을 권면하거니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어졌으니 또 너희의 양심에도 알리어지기를 바라노라』주님의 두려우심은 그리스도의 심판을 의미하는 것이다. 성도들은 심판의 두려움을 알기 때문에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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