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로마서 1장 17절) 『복음에는(엔 아우토) 하나님의 의(디카이오쉬네)가 나타나서(아포칼륍테타이) 믿음으로(에크 피스테오스) 믿음에 이르게(에이스 피스틴)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엔 아우토는 이것 안에라는 말이다. 이 말은 1장 16절의 토 유앙겔리온(복음)을 말하므로서, 엔 아우토는 복음 안에 라는 의미가 된다. 복음 안에 하나님의 의가 계시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의라고 번역된 디카이오쉬네는 재판에서 사용되는 용어다. 공정한 재판을 의미한다. 그어므로 의롭다는 말은 옳고 그름을 공정하게 판결한다는 의미이며, 불의하다는 말은 옳고 그름을 편파적으로 판결한다는 말이다. 청탁을 받고 편파적으로 판결하는 재판관을 불의한 재판관이라고 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의는 인간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다. 성경은 재판장으로서의 하나님의 의로움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아포칼륍테타이(현재시제, 수동태)의 기본형은 아포칼륍토이다. 아포(from)와 칼륍토(cover)의 합성어로서 덮게를 벗기다 라는 의미이다. 덮개를 벗겨서 그 안에 숨겨져 있는 것을 은연 중에 드러낸다는 의미다. 문법적으로 현재시제 수동태이므로, 복음 안에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에 의해 계속적으로 계시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서 복음은 성경의 말씀이 아니라 호 로고스인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에크~에이스는 영어의 from ~into와 같은 개념이다. 복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에 의해 계시되어지는데, 믿음에서 시작해서 믿음 속으로 들어갈 때 까지 그렇게 된다는 의미다. 시작하는 믿음은 초보적인 믿음(내가 믿는 믿음)이고, 믿음 속으로 들어가는 믿음은 거듭난 자의 믿음(하늘로부터 오는 믿음)인 것이다.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한글 개역개정으로 번역된 이 부분을 헬라어 성경으로 보면,『카도스(~같이) 게그랍타이(그것이 기록된 것) 호(그) 데(그래서) 디카이오스(의인은) 에크(~부터) 피스테오스(믿음으로) 제세타(자신을 살릴 것이다)』이다. 의인은 믿음으로 부터 자신을 살리게 될 것이다. 즉 믿음으로부터 시작한 의인은 자신을 살릴 것이다 라는 의미가 된다. 『호(그) 데(그래서) 디카이오스(의인은)』에 대해서는 신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로 결심하여 자신의 작은 믿음에서 시작하여 신앙의 목표인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안으로 들어가는 자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믿기만 의인이 된다는 말은 잘못된 것으로, 칭의는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자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오늘날『예수믿으면 구원받는다』고 말들을 하는데, 죄인들은 예수를 믿는다고 말은 하지만, 자기를 신뢰하고 예수도 믿는다. 복음서에서 소개하는 믿음이 이런 것들이다. 베드로도 바다 위를 걷고, 온갖 기적을 경험했던 예수님의 제자였지만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는 예수를 세번이나 부인하는 그런 믿음의 소유자였다. 믿음은 어제의 믿음과 오늘의 믿음이 서로 다를 수 없는 것이다. 어제는 믿었는데, 오늘은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 믿음이 아니다. 과거에는 주님을 바라보고 감동을 받았을지라도, 오늘 작은 문제 앞에서 주님의 말씀을 외면한다면 예수를 세번 부인한 베드로와 다를 바가 있는가? 믿음은 문제해결 받는 믿음에서 변화받는 믿음으로 바뀌어야만 한다. 회개해서 의인으로 된 자가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죄인은 자기를 믿지, 예수를 주인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회개하지 않은 죄인은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도 믿음에 이를 수 없는 것이다. 회개하지 않은 자는 자기가 주인이다. 교회에서『당신은 구원받았습니다』라고 말을 해도, 하나님은 열매로 판단하지 인간들의 말에 의해서 구원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 열매는 회개의 열매다. 열매는 생명의 역사가 나타난다. 열매는 씨앗이 자라서 생명이 되는 것이다. 회개하지 않으면 생명이 없는 열매가 된다. 

(로마서 1장 18-19절)『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카테콘톤) 사람(안드로폰 톤)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파산 아세베이안)과 불의(아디키안)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아포칼륍데타이)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토 그노스톤 투 데우) 그들 속에 보임(파네론)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에파네로센)』 

아디키안 안드로 폰은 그 사람들의 불의이다. 하나님의 진노는 그 사람들의 불의 때문이다. 그 사람은 로마교회의 신자신자들처럼 예수를 주로 영접하고 성령체험까지 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행하는 불의를 의미한다. 파산 아세베이안 카이 아디키안은 모든 불신앙과 불의다. 카테콘톤의 기본형은 카테코이다. 카테(강세형 접두어)와 에코(갖고있다)의 합성어로서 (무엇을) 꽉 붙잡다, 고수하다 라는 의미다.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의 진리를 당연히 고수해야 하는데, 그러나 복음의 진리를 불의 안에서 고수할 때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아포칼륍데타이는 계시되어지다 라는 의미다. 숨겨져 있던 하나님의 진노가 드러나고 있다는 의미다.

토 그노스톤 투 데우는 하나님의 그 알려진 것이라는 의미다. 하나님이 자신을 그 사람들 안에 명백히 나타내 보이셨다는 것이다. 기노스코는 체험적으로 관계를 통해서 알다(히브리어 야다와 같은 개념)는 의미다. 파네론과 에파네로센의 기본형은 파네로스인데, 빛을 비추어서 무엇인가를 밝히 보이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 기독교의 문제는 예수님이 내 안에 있다는 사실을 지식으로 알고 있지만, 실제 체험적으로 심령 속에 임재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그것은 성경 속에서만 하나님을 찾기 때문이다. 말씀이신 호 로고스는 심령 속에 임재하시며, 성경 속에서는 하나님은 레마로 역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레마를 통해서 성령 감동을 받으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직통계시를 통하지 않고, 성경 속에서 말씀을 읽고 성령의 감동으로 깨달음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깨달음의 종교가 아니라, 호 로고스와 직접 대화하는 종교인 것이다. 

(1장 20절)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토이스 포이에마신)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조직신학에서는 이 귀절을 두고 하나님의 자연계시라고 말을 한다. 그러나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을 믿는 자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애니미즘에 빠질 수 있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토이스 포이에마신은 만든 것들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만든 인간에 대한 언급이다. 창조 이후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그들 안에 계신다는 사실을 깨달아 알게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을 분명히 볼 수 있게 하셨다.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은 자들은 태어날때부터 그 안에 사탄이 주인이 되어 있다. 그 이유는 하나님 나라에서 범죄한 자가 흙속에 갇혀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믿음으로 성도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사탄으사부터 자유인이 된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들 중에 자기 안에 계신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할 때가 있다. 

(1장 21절) 『하나님을 알되(티오티 그논테스 톤 데온)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우크 에위카리스테산)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에미타이오데산 엔 토이스 디알로기스모이스)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티오티 그논테스 톤 데온에서 그논테스는 기본형인 기노마이에서 유래된 것으로, 하나님을 알되 체험적 관계를 통해서 아는 것을 의미한다. 아오리스트 시제를 사용한 것으로서, 이들이 성령세례를 받고 하나님을 알게된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지 못한 존재들을 말한다. 에위카리스테산은 아오리스트 시제, 수동태로서 마음 속의 깊은 곳에서 순간적으로 올라오는 감사를 의미한다. 디알로기스모이스는 인간의 단순한 생각이 아니라 호 로고스의 말씀이신 그리스도로 부터 온 생각이다. 성령의 사람은 자신의 생각으로 살지 않고 말씀이신 그리스도로부터 온 생각으로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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