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

(로마서 3장 28절)『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르곤 노무)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로기조메다)』기독교의 핵심은 복음이지 율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로기조메다는 가치를 판단하다 라는 의미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믿음의 가치때문이지 율법의 가치 때문은 아니라는 것이다. 에르곤 노무는 율법의 사역이다. 한글 개역개정에는 율법의 행위라고 번역했는데, 이 행위로 인해서 믿음의 행위로 대비시켜 선한 믿음의 행위가 있어야 한다고 말들을 하는 것이다. 에르곤은 선한 행위가 아니라 일로 인한 수고(사역)를 의미한다. 

(3장 29절)『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세상 사람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보편적인 은혜인 것이다. 

(3장 30절)『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디키이오세이 페리토멘 에크 피스테오스)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아크로뷔스티안 디아 테스 피스테오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여기서『디키이오세이 페리토멘 에크 피스테오스』는 할례자를 믿음으로부터 의롭게 하실 것이고,『아크로뷔스티안 디아 테스 피스테오스』 무할례자를 그 믿음을 통하여 의롭게 하실 것이다. 유대인들에게는 관사가 없는 피스테오스(믿음)를 사용했고, 이방인들에게는 전치사(디아)가 있는 피스테오스를 사용했다. 관사가 없는 믿음은 일반적인 믿음이고, 전치사가 있는 믿음은 특별한 믿음인 것이다. 유대인들은 이 믿음을 구약시대부터 가져온 것이다. 다만 그들이 아브라함과 같은 그런 믿음을 가지지 못한 것 뿐이다. 그래서 유대인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야 구원을 얻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방인들에게는 이런 믿음이 처음부터 주어지지 않았다. 스스로 이런 믿음이 없으므로 에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라는 말이 들어가는 것이다. 

(3장 31절)『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유대인이든 할례인이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율법은 율법주의와 다르다. 율법 속에는 그리스도가 있는 것이다. 율법 속에는 하나님의 의와 사랑이 있는 것이다. 율법의 조문에 얽매이지 않고 율법이 의도하고 있는 내용을 통해서 깨닫고 행하라는 것이다.

(4장 1절)『그런즉 육신으로(카타 사르카) 우리(헤몬) 조상(톤 프로파토)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휴레케나이) 하리요(에루멘)』헬라어 성경을 보면 『티(무엇) 운(그런즉) 에루멘 휴레케나이 아브라함 톤 프로파토라 헤몬 카타 사르카』로 되어 있다. (그런즉 우리의 조상 아브라함이 육신을 따라 무엇을 찾겠다고 말할 것인가) 라는 것이다. 티는 무엇인데, 하나님의 의를 의미한다. 바울은 하나님의 의와 믿음을 연결시키는 것이다. 육신을 따라서(카타 사르카)는 하나님의 의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휴레케나이는 숨겨진 것을 찾는 의미다. 즉 육신을 따라서는 숨겨진 것을 찾을 수 없다는 말이다. 

(4장 2절)『만일(에이) 아브라함이 행위로써(엑스 에르곤)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에디카이오데)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에케이 카우케마) 하나님 앞에서는(프로스 데온) 없느니라(우)』엑스 에르곤은 사역들부터, 에디카이오데는 의롭게 되었다면, 에케이 카우케마는 그는 갖고 있다는 말이다. 프로스 데온은 하나님을 향해서 라는 말이다. 번역해보면,『왜냐하면 만일 아브라함이 사역들로부터 의롭게 되었다면 그는 자랑할 것이 있지만, 하나님을 향해서는 없느니라』 라는 것이다. 인간의 육신에는 무엇인가 의로운 일을 하고자 하는 기본적인 마음이 있다. 그래서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한 것을 하면 자랑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랑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육신이 아니라,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 것이다. 

(4장 3절)『성경이(그라페) 무엇을(티) 말하느냐(레게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토 데오) 믿으매(에피스튜센) 그것이 그에게 의로(에이스 디카이오쉬넨) 여겨진 바(엘로기스데) 되었느니라』 

헬라어 성경은 『티 가르 헤 그라페; 레게이 에피스튜센 데 아브라암 토 데오 카이 엘로기스데 아우토 에이스 디카이오쉬넨』이다. 왜냐하면 그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그런데,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다. 그런데 그것이 그에게 의로움 안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여겨졌다 라는 것이다. 즉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한데, 에피스튜센 데 아브라암 토 데오에서 토 데오가 목적격이 아니라 여격으로 되어있다. 하나님이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관계인 것이다. 하나님을 믿음의 대상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를 통해서 믿는 것이다. 관계라는 것은 하나가 되는 관계다. 에피튜오센은 아오리스트 시제로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를 통해 순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성령세례를 받는 것처럼 아브라함도 순간적으로 믿음의 관계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이 믿음은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믿음인 것이다. 오직 자기를 부인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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