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로 여기심을 받는 자
로마서 4장 4절『일하는(에르가조메노) 자에게는 그 삯(미스도스)이 은혜로(카타 카린)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오페일레마) 여겨지거니와』그런데 사역하는 그에게는 그 삯이 은혜를 따라 여기지 않고 빚을 따라 여겨진다. 사역하는 그는 자기의 의를 따라 행하는 자를 의미하며, 자기의 의를 따라 행하는 의는 도움을 받은 사람에게 빚으로 남는다. 그러나 믿음으로 인한 하나님의 의는 누구에게도 빚으로 남지 않는다.
4장 5절『일을 아니할지라도(메 이르가조메노) 경건하지 아니한 자(톤 아세베)를 의롭다(디카이오쉬넨) 하시는 이를 믿는(피스튜온티)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헬라어를 통해서 보면 『토 데 메 에르가조메노 피스튜온티 데 에피 톤 디키이운타 톤 아세베 로기제타이 헤 피스티스 아우투 에이스 디카이오쉬넨으로서』그런데, 사역하지 않는 그에게 경건하지 않는 자를 의롭게 만드는 그 분 위에서 믿는 그에게는 그의 믿음이 의로움 안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여겨진다.
믿음이 성령을 받는 순간 주어지는 것이다. 이런 믿음은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회개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그 이유는 자기의 의를 따라 살지 말고 하나님의 의를 따라 살도록 하기 위함이다. 자기라는 존재는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서 하나님을 떠난 옛사람인 것이다. 의롭게 하는 그 분 위에서(에피 톤 디티이운타) 믿음을 가진 자는 아브라함이라는 것이다. 그의 믿음은 아브라함이 소유한 믿음이다. 그러나 그 분 위에서 믿는 그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이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을 소유했다는 것이다. 이는 아브라함과 하나님과의 친밀한 동행관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렇게 될 때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자기라는 옛사람이 십자가에서 죽고, 하늘로부터 새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과 같은 개념인 것이다. 엣사람이 죽지 않는 자는 다시 태어남도 없는 것이다. 세상을 사랑하는 자는 여전히 자기가 주인인 것이다.
4장 6절『일(에르곤)한 것이 없이(코리스) 하나님께 의(디키이오쉬넨)로 여기심(로기제타이)을 받는 사람(투 안드로푸)의 복(톤 마카리스몬)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헬라어 성경을 보면 카타페르(~같이) 카이 다위드 레게이 톤 마카리스몬 투 안드로푸 호 데오스 로기제타이 디키이오쉬넨 코리스 에르곤이다.『마치 다윗이 그 사람의 행복을 말한 것처럼 그런데 그와 관련하여 하나님은 일한 것이 없이 의로움을 평가하신다.』그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 모든 사람에게 행복(마카리오이)을 주는 그 사람(투 안드로푸)이다.
4장 7절『불법(아노미아이)이 사함(아페데산)을 받고 죄(하마르티아이)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혼)은 복이 있고』 혼은 관계대명사로서 여격이다. 그런데, 그와 관련하여 라는 의미다.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는 사람은 하나님이 일한 것이 없이 의롭다고 평가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의로운 일을 하시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의로운 일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의로은 일에 동참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마르티아이는 죄들이다. 원죄와 세상죄를 다 포함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을 통하여 그 일을 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의 불법을 용서해주시고 죄들을 덮허주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안으로 들어온 자에게 이런 복을 주시는 것이다. 에수믿기만 하면 이런 복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믿음 안으로 들어와야 하는 것이다.
4장 8절『주께서 그 죄(하마르티안)를 인정하지(로기세타이) 아니하실(우) 사람(아네르)은 복이 있도다(마카리오스) 함과 같으니라』 헬라어를 보면 마카리오스 아네르 후 우 메 로기세타이 퀴리오스 하마르티안이다.『남자는 복이 있다. 그런데 그의 주님은 (그의 종들을) 결코 죄를 평가하지 않는다 라는 것이다.』안드로푸(사람)는 성별에 관계없이 사용되는 사람이고, 아네르는 남자이다. 즉 성별이 있는 사람이다(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 아네르는 4장 6절의 투 안드로푸(그 사람: 예수 그리스도)와 구별된다.
4장 9절『그런즉 이 복이 할례자에게냐 혹은 무할례자에게도냐 무릇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헤 피스티스)이 의(디카이오쉬넨)로 여겨졌다(엘로기스데) 하노라』 엘로기스데는 아오리스트 시제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의롭다고 평가되는 것이 순간 성령세례를 통해 일어난 것이다. 바울은 모형론적 성경해석에 있어서 아브라함이 가진 믿음을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의 모형으로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사는 것처럼, 아브라함도 씨의 언약인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살았다는 것이다.
4장 10절『그런즉 그것이 어떻게 여겨졌느냐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요 무할례시니라』바울은 할례나 무할례는 하나님이 의롭다고 여기시는 것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말한다. 오직 믿음인 것이다.
4장 11절『그가 할례의(페리토메스) 표(세메이온)를 받은(엘라벤)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스프라기다)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테스 피스테오스)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디카이오쉬네스)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헬라어를 보면, 『카이 세메이온 엘라벤 페리토메스 스프라기다 테스 디카이오쉬네스 테스 피스테오스 테스 엔 아크로뷔스티아』번역을 하면, 그리고 그가 할례의 표를 받았다. 그 믿음의 의로움의 인침이라는. 무할례 안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의롭다 여김을 맏은 것은 할례나 무할례와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명하셨다. 아브라함이 99세의 나이에 할례를 받고 13세된 이스마엘과 집안의 모든 종들에게 하례를 했다.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침 것이라고 했다. 바울은 아브라함의 할례를 일종의 증표로 설명한다. 어떤 일을 했을 때 확인 도장을 찍어주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브라함이 하나님께 의롭다 여김을 받은 것은 믿음 때문이지 할례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4장 12절『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따르는 자들에게도 그러하니라』 하나님이 확인도장과 같은 할례를 태어난지 팔일 밖에 안되는 갓난 아이에게 왜 행하도록 했는가? 중요한 것은 할례를 행하는 자의 믿음인 것이다. 믿음은 믿는 자의 사람을 통해서 다음 세대에 흘러가는 것이다. 할례의 의식과 세례의 의식은 상징적이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이 흘러가는 것을 믿는 의식인 것이다. 할례가 의롭다 여김을 받는 사람에게 주는 증표라면 물세례 역시 의롭다 여김을 받는 증표이다. 그러므로 성령세례와 연결되어야만 이 증표가 효력이 있는 것이다. 성령세례를 받은 자에게 증표로서 세례가 행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4장 13절『아브라함이나 그 후손(토 스페르마티)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코 클레로노몬 아우톤 에이나이 코스몬)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알라 디아 디카이오쉬네스 피스테오스) 것이니라』토 스페르마티는 그 씨이다. 씨와 후손은 다른 개념이다. 씨는 시작을 의미하고, 후손은 그 씨로부터 나온 것인데, 반역상의 오류다. 하나님의 약속은 믿음의 씨인 아브라함과 예수 그리스도에게 맞추어진다. 씨가 없으면 후손도 없는 것이다.
토 아브라암 에 토 스페르마티 아우투(그 아브라함이나 그의 씨)는 아브라함이나 아브라함과 같은 그 씨라는 의미로서 여기서 그 씨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아브라함도 믿음의 씨이지만, 에수 그리스도 역시 믿음의 씨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씨가 되어서 이스라엘이 나왔다면 에수 그리스도가 믿음의 씨가 되어 기독교가 나온 것이다.
『코 클레로노몬 아우톤 에이나이 코스몬』은 세상의 상속자인 그를 존재하도록 하는 그 씨다. 토는 주격인데, 토가 성별로는 중성으로서 앞의 토 스페르마티(그 씨)를 가리키는 것이다. 토 스페르마티를 통해서 세상의 상속자가 존재한다는 말이다.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