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ㅣ로마서 8장 1-2절『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정죄를 받지 않는다. 죄를 규정할 율법이 없기 때문이고,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성령의 법으로 인도받기 때문이다. 죄와 사망의 법이란 종교심으로 위장하여 신도들을 다스리는 율법주의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종교적 율법은 기독교 내에 자리잡고 있다. 구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예수의 믿음과 연합이 필요하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예수와 함께 부활하는 그 믿음이다.
8장 3절『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에스데네이 디아 테스 사르코스)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사르코스 하마르티아)의 모양(호모이오마티)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성도 안에 있는 죄의 문제를 해결 할 수 있음을 말했다. 바울은 육신이 연약해진 이유(에스데네이 디아 테스 사르코스)는 육신이 율법의 통로가 되므로 약해졌다는 것이다. 육신의 연약함은 죄의 육신(사르코스 하마르티아) 때문이다. 죄의 육신이란 죄가 소유한 육신을 의미한다. 인간의 육신이 죄의 소유가 되었기 때문에 아무리 의로운 율법을 만들어도 죄가 율법을 이용하여 육신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죄의 소유가 된 육신의 모양으로 세상에 보내신 것이다. 호모이오마티 사르코스는 예수님이 죄로 인해 연약해진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셨다는 말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그런 모습으로 보였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죄가 없었지만, 유대인들은 예수를 죄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죄명은 신성모독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인데, 유대인들이 보기에는 예수를 신성모독하는 사람으로 보인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육신적 연약함 때문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인간의 육신 안에 있는 죄(원죄)가 모든 악의 근원임을 나타낸 것이다. 인간의 육신 안에 있는 죄는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탐욕이다. 그것이 악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세상에 들어와서도 죄(세상죄)를 짓는 것이다. 죄에서 벗어나는 길은 죄에 대해서 죽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와 함께 연합되어 죽는 것이 곧 죄로부터 벗어나는 길이다. 그래서 다시 새생명으로 태어나 성령세례를 받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 살아가는 것이다.
8장 4절『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율법은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법이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해주신다. 그러나 율법 속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은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으면 죄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닫게 해주시고, 성령을 따라 행하라고 말씀해주시는 것이다. 율법과 율법주의는 다른 개념이다. 율법주의는 조문에 얽혀 지키느니 마느니 하는 그런 개념이지만, 율법은 그 속에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라는 의미가 된다. 그래서 성령을 따라 행하는 자는 율법 속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깨닫고 율법의 규정을 따라서가 아니라, 성령의 인도를 받고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다. 십계명의 조문에 그렇게 쓰여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의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성령의 마음으로 행하라는 것이다. 어떻게 행동의 결과로 나타날지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8장 5절『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프뉴마:성령)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육신을 따르는 자들은 육신의 일에 관심을 갖는다. 육신의 일은 하나님 나라가 아닌 세상에 관심을 갖는다는 의미다. 그러나 성령을 따르는 자는 하나님 나라의 일을 생각하는 자들이 된다.
8장 6절『육신의 생각은 사망(다나토스)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사망이라는 말은 영의 죽음이다. 세상을 사랑하는 자는 결국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자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사탄을 상징하며,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사탄의 종이라는 의미다. 다나토스는 죄 가운데서 살다가 죽는 것을 의미한다.
8장 7절『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에크드라)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휘포타쎄타이)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에크드라는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싫어한다. 왜냐하면 스스로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휘포타쎄타이는 현재시제 수동태로서, 하나님의 법에 복종되어지는 것은 인간의 의지가 아니라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그렇게 된다.
8장 8절『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받아드릴 능력을 상실한 것이다. 그 이유는 스스로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8장 9절『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프뉴마티)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프뉴마)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프뉴마티나 프뉴마는 성령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들이냐 아니냐는 성령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소유가 된 자를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소유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처럼 되고 싶었던 탐욕의 원죄를 회개하고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믿으면 하나님이 예수와 함께 부활시켜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되게 해 주신다. 즉 비록 육신이 있지만 이전의 사람과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다. 속사람(예수 그리스도)가 이끄는 자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전히 죄를 날마다 회개하고 율법을 통해서 죄를 짓는지 않짓는지 살펴서 육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살아야 한다고 믿는다면 역시 율법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인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된다는 것은 성령이 인도하는 자가 되기 때문에 항상 심령 속의 호 로고스와 대화를 하면서 살아야 하며, 육신의 연약함으로부터 오는 죄의 접근은 성령을 따라 행하여 막는 것이다. 항상 성령이 있는 자는 성령이 이끄시는대로 살게된다. 자신이 죄에 대해서 어떻게 살고 죄를 지으면 어떻게 회개하고 하는 생각을 버려야만 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 성령의 세례를 받고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지 않은 사람이 성령을 구하게 되면 악령의 인도를 받게 된다.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예수와 함께 죄(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탐욕)에 대해서 십자가에서 죽어야 함을 잊어서는 안된다.
8장 10절『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데 프뉴마 조에 디아 디카이오쉬넨)』 데 프뉴마 조에 디아 디카이오쉬넨 이 말은 그 성령은 의 때문에 생명이 있다라는 의미다. 예수님이 생명이라는 말은 모든 피조물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죽은 생명을 살리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라는 것이다.
8장 11절『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죄에 사로 잡혀 우리 몸은 죄 때문에 죽은 상태이나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가 있다면 성령으로 생명을 살리는 의로운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을 잘못 왜곡하면, 몸은 죄로 죽은 상태이지만, 영은 살아서 구원받는다 라는 것이다. 이 말은 이단적인 발언이다. 그래서 몸은 죄를 짓더라도 영만 구원받아서 천국을 간다 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육의 몸은 죽고 성령의 능력으로 영의 몸으로 다시 살아난 것이다. 그래서 다른 이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모든 일이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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