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로마서 9장 15절『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바울은 하나님이 야곱보다 에서를 사랑하셨다는 말을 한 뒤 이 말을 하신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야곱을 편애한 것이 아님을 말해준다. 하나님은 에서보다 야곱을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기시는 것이다. 출애굽기 33장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하신 말씀을 인용해서 이에 대한 해답을 찾는다. 출애굽기 32장에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간지 사십여일이 지나도 내려오지 않자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님이라고 숭배한 사건이 있었다. 하나님은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모세로 하여금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라고 말씀하셨는데, 모세는 백성들을 용서해 달라고 간구한다. 그런데, 모세의 간구로 하나님이 백성들의 죄를 용서해 주신다. 모세는 자신을 포함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동행하여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주실 것을 간청했다. 그 때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바울이 인용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무에게나 은혜와 긍휼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만 긍휼히 여기고 은혜를 베푸신 것이다. 야곱과 모세는 하나님이 동행하여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하나님 나라를 이룰 수 없음을 알았기에 자신이 가는 길에 하나님이 동행하여 주실 것을 간절히 구한 것이다. 야곱이 얍복강에서 하나님과 씨름하면서 매달린 것도 이 때문이었다. 

9장 16절『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모세와 야곱이 했던 것처럼, 하나님이 동행하지 않으면 절대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지 않음을 알고 간절히 매달려야 한다는 것이다. 

9장 17절『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에이스 아우토 투토)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엔데익소마이)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모세가 바로의 이야기를 한다. 하나님이 모세를 하나님 나라의 지도자로 세운 것처럼 바로도 하나님 나라의 지도자로 세웠다는 것이다. 이 땅에 있는 왕들은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해 택함을 받을 수 있다. 하나님이 이 일을 위해 내가 너를 세웠다 라고 말하는데, 에이스 아우토 투토는 이땅에 세우려고 하는 의의 나라 건설을 위해 바로를 택하여 세우고 그 안에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 보이려고 했다는 것이다. 

엔데익소마이는 아오리스트 시제, 중간태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능력을 바로 왕 안에서 순간 나타내 보이신다는 것이다. 중간태를 쓴 것은 하나님이 자신을 나태내 보인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지도자인 모세 뿐만 아니라 이방 나라인 애굽의 바로 왕 속에도 독같이 역사하신다는 것과 그들을 왕으로 세움으로 이 땅에 하나님 나라의 의와 하나님 나라를 건설한다는 것을 보여주신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 안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 보이고 그로 인해 하나님은 없고 오직 권세에 대한 욕심만 있기에 하나님의 이름이 더렵혀지고 그래서 세상의 지도자는 멸망하고 그 나라도 파멸되는 것이다. 이는 교회 안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많은 교회 지도자가 마치 자기가 신이나 된 것처럼 행동하는 자들이 있는데, 결국 파멸될 것이라는 말이다. 

9장 18절『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스클레뤼네)』지도자로 택함을 입은 자가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간절히 바란다면 하나님은 그를 긍휼히 여기시고 그렇지 않다면 그를 완고하게 하실 것이다. 스클레뤼네는 완고하다 라는 말이다. 고집스런 마음이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사사시대 이후에 왕권시대에서 많은 왕들이 있었는데, 하나님은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게 한 왕이라고 말을 하신다. 다윗은 하나님께 항상 긍휼을 구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교회의 지도자들도 하나님께 긍휼을 구하여야 할 것이다. 

9장 19-21절『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하나님 나라는 절대주권을 가진 하나님이 왕이시다. 왕이신 하나님이 절대 통치하신다. 그 이유는 하나님 만이 절대 능력과 절대 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토기장이의 예가 등장하는데, 이것으로 인해서 칼빈의 예정론이 등장했는데, 그러나 토기장이의 비유는 창조주의 절대 주권을 말하는 것이지 예정론과 관련된 말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이루어지지만,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 것과는 다른 의미를 갖는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이 예정론으로 발전한 것이다. 토기장이는 하나님을 상징한다. 하나님은 흙으로 사람도 만들고 동물들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토기장이가 귀히 쓸 그릇만 만들지 왜 천히 쓰이는 그룻도 만들었느냐 라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답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며, 하나님이 보시기에 다 필요하다는 말이다. 이 세상에 있는 인간들은 이 모양 저 모양으로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데 필요한 존재라는 것이다. 

9장 22절『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스큐에 오르게스)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스큐에 오르게스는 불의를 행함으로 멸망으로 들어가는 자를 의미한다. 하나님이 불의를 얼마나 미워하시는지 사람들로 알게하여 하나님의 능력 안으로 들어오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불의를 미워하시는 것을 안다고 하더라도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의로운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불의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피하는 길은 의로우신 하나님께로 나아와 전능하신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 길 외에는 방법이 없는 것이다. 이미 불의 가운데 빠져 멸망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인간을 하나님이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는 이유는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의로운 삶을 살 수 없는 존재임을 하나님이 아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이 의로우신 하나님의 능력 안에 들어오기를 관용하며 기다리는 것이다. 

9장 23절『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스큐에 엘레우스)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스큐에 엘레우스는 긍휼의 그릇인데, 진노의 그릇과 대조시킨다. 긍휼의 그릇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받기 위해 예비된 그릇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은 오래 참음으로 관용하신다는 것이다. 인간들은 자신들의 연약함으로 인해 불의를 행하는 자신들의 모습으로 힘들어 하며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셔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고 그로 인해 의를 행하는 그들로 인해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이다. 바울은 토기장이의 비유를 통해 토기장이이신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통치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주권자이신 하나님이 하나님 나라의 일꾼들을 어떻게 택하시고 그들을 어떻게 대하시는가이다. 하나님은 불의를 행하는 진노의 일꾼들을 오래참음으로 관용하시고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어 하나님의 의를 행하는 긍휼의 일꾼들을 통해서는 영광을 받으신다. 

9장 24절『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바울은 토기장이의 비유가 바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것임을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과 이방인 중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인데, 우리를 하나님의 일꾼으로 부르신 것은 절대주권자이신 하나님의 택하심으로 인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진노의 그릇이 될 수 있고, 긍휼의 그릇도 될 수 있다.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오래 참음에도 불구하고 불의를 행하는 일꾼이 된다면 진노의 그릇이 될 것이고,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어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의를 행하는 일꾼이 된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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