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로마서 6장 1-5절)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6장 1절『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카리스 플레오나세) 하려고 죄(테 하마르티아)에 거하겠느냐(에페메노멘)』 카리스 플레오나세는 은혜가 풍성하도록, 테 하마르티아는 ㄱ 죄이다. 에페메노멘은 우리가 계속 머물겠는가 라는 것이다. 로마서 5장 20절에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쳐난다는 말이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을수록 복음의 은혜가 넘쳐난다는 의미가 된다. 하나님은 은혜는 죄를 깨닫고 회개할 때 은혜가 주어지는 것이다.
6장 2절『그럴 수 없느니라(메 게노이토) 죄에 대하여 죽은(아페다노멘 테 하마르티아)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제소멘 엔 아우테)』 그런 것이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는 그 죄와 관련하여 죽게했는데, 어떻게 우리가 그것 안에서 살것인가? 라는 말이다. 케노이토는 희구법(소원) 아오리스트 시제이다. 바울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죄안에서 거하는 일이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소망을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성도는 죄와 관련하여 죽었기 때문이다. 테 하마르티아는 율법을 범한 죄가 아니라 육신의 약함으로 인해 짓는 죄를 의미한다. 죽었다 라는 아포다노멘의 의미는 목숨이 끊어진 것이 아니라 어떤 목적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 바로 아포다노멘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그렇듯이 성도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죄에 대해 죽는 것이다. 죄에 대해서 죽은 자가 되는 것과 죄를 짓지 않으려고 소원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것이다. 인간은 죄를 완전히 짓지 않을 수 있다 라고 말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만큼 연약한 인간은 죄에 노출되어 있다.
6장 3절『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에밮디스멘 에이스 크리스톤 예순)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에 아그노에이테)』 에밮디스멘 에이스 크리스톤 예순은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세례를 받은 것이다. 에 아그노에이테는 책망하는 질문이다. 예수믿고 구원받은 성도는 당연히 알아야 하는데, 왜 모르느냐 라는 것이다. 여기서 세례받은 것은 성령세례를 의미한다. 성령세례를 받아야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간 자가 되는 것이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려면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야 하며,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려면 성령세례를 받아야 한다. 성령세례는 회개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 것이다. 회개는 죄에 대해서 죽은 자가 되는 것이다. 회개는 자신이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탐욕에 대해서 돌이키는 것이다.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것이 죄의 근원이다. 죄의 근원에 대해서 돌이키지 않은 자는 회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죄의 근원은 탐욕이라고 말을 할 수 있다. 그 탐욕이 우상숭배이고, 마음 안에 감추어진 뱀(사탄)인 것이다. 사탄이 지배하는데, 말로 예수믿는다고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탐욕이 죽어야만 한다. 세상죄는 탐욕이 바탕이 될 때 짓는 것이므로 원죄인 탐욕이 죽으면 자연스럽게 세상죄는 해결될 것이다. 예수님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의 죄를 그의 피의 대가로 모두 가져가신 것이다.
성령세례를 받고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죄에 대해서 죽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가 된다. 인간은 스스로 죄에 대해서 죽을 수 없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가 죄에 대한 대속의 죽음을 하시는데, 그 죽음이 바로 죄인 자신임을 깨닫고 회개하는 것이다.
6장 4절『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디아 투 밮티스마토스)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쉬네타페멘)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헤메시스 엔 카이노데티 조에스 페리파테소멘)』
쉬네타페멘은 아오리스트 시제를 사용하였다. 이런 일이 디아 투 밮티스마토를 통해서 순간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역기서 말하는 세례는 성령세례를 의미한다. 성령세례는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하여 죽음으로 세상의 욕망과 작별하는 것이다. 성령세례와 물세례를 비교하면, 물세례는 성령세레를 받은 자가 의식적으로 행하여 자신이 성령세례받은 자임을 확인하는 것이다. 성령세례를 받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하나님을 떠난 존재(옛사람)라는 것을 회개하며, 자신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에 대해서 죽은 자임을 고백할 때 하나님이 성령으로 인을 쳐 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의 심령 속에서 호 로고스가 임재하게 됨을 믿는 것이다. 따라서 성도는 그 호 로고스를 주로 영접하며 그 분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다. 이런 일은 순간 일어나므로 성도는 확연히 깨달을 수 있다. 만일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생각하는데도 여전히 세상을 따라 산다면 성령세례를 받은 것이 아닌 것이다. 이는 열매로 알 수 있게 된다.
헤메시스 엔 카이노데티 조에스 페리파테소멘 이 말은 우리도 생명의 새로움 안에서 폭넓게 활동할 것이다 라는 의미다. 페리파테소멘은 아오리스트 능동태로서 성도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나서 새 생명 가운데서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로 폭넓은 삶을 사는 것이 순간적으로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육체의 부활이 아니라 영적인 몸의 부활을 의미한다. 영적으로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인 것이다. 에스겔 골짜기에서 영적으로 죽은 뼈들에게 생명이 들어가 부활한 것처럼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 가득한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먼저 부활하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6장 5절『만일(에이)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토 호모이오마티 투 다나투 아우투)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가르 쉼퓌토이 게고나멘)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가르 쉼퓌토이 게고나멘은 우리가 연합한 자가 되었다면 이라는 의미다. 쉼퓌토이는 쉼과 퓌토이의 합성어로서, 퓌토이는 멈추었던 숨을 훅 쉰다는 것이다. 그래서 생명활동이 살아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와 함께 죽었던 생명을 순간적으로 살아나게 하기 위함이었다. 토 호모이오마티 투 다나투 아우투는 『그의 그 죽음의 같은 모양으로』이다. 호모이오마티에서 호모이오마는 무엇인가 연합하여 같은 모양이 되는 것이다. 십자가의 복음의 원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연합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난받았으니 신도들도 고난받아야 한다고 말한다면 복음의 원리를 이해하지 모한 사람인 것이다.
게고나멘(되었다면:과거완료)과 에소메다(존재할 것이다:미래시제)와 비교하면, 성도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어서 싹이 나는 상태가 게고나멘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여 하늘에 세워진 존재가 되는 것이 에소메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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