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로마서 7장 9절『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바울은 율법을 몰랐을 때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되었다고 말한다. 계명을 지키려고 했을 때 자신은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지므로 죽었다고 표현했다. 바울은 이런 진실을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 깨닫게 된 것이다. 생명 속으로 들어갈 계명이 오히려 바울을 죽음으로 들어가게 만든 것이다. 

7장 10절『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율법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감추어져 있다. 그런데, 계명에 얽매인 율법주의는 오히려 그 생명을 죽이는 것이 된다. 율법주의 자들은 스스로 종교적인 열정을 가지고 저신이 속한 공동체의 율법을 철저히 지킴을 통해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일 뿐이다. 

7장 11절『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아펙테이넨)』아펙테이넨은 무참히 살해하다 라는 의미다.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로마교회 안에 몰래 들어온 율법주의 신앙에 대해서 그 위험성을 알리는 것이다. 대부분의 종교는 율법주의 신앙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는 율법주의가 아니라 성령의 인도를 받는 종교인 것이다. 만일 무엇인가 지켜야 한다고 말을 한다면 그것은 이미 기독교가 아닌 것이다. 

7장 12절『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율법과 계명은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것이다. 바울이 이 율법과 계명을 거룩하다 라고 말하는 이유는 그 속에 그리스도가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율법과 계명 속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의 의미를 깨달아야 하는데, 율법주의자들은 그 의미는 놓치고 오직 그 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에 놓여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알지 못한 것이다. 

7장 13절『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메케이노) 오직 죄(하마르티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메케이노는 있어서는 안될 일이다 라는 말이다. 율법과 계명에 대해서 어떻게 백성들이 죄 가운데 빠지게 되었는가를 바리새인 시절 경험을 통해서 밝히는 것이다. 바울은 율법을 철저히 지킴으로서 하나님께 나아가려 했던 자신에게 하나님과의 단절되는 일이 벌어졌다는 것은 인간 속에 있는 죄의 죄됨을 더 심하게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하마르티아는 죄로 번역되지만, 세상죄를 의미한다기 보다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탐욕의 마음을 의미한다. 물론 세상죄도 좁은 의미에서 죄이지만, 죄의 근본은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탐심이다. 하마르티아는 표적에서 벗어난 것을 의미한다. 

7장 14절『우리가 율법은 신령한(프뉴마티코스)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사르키노스)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앞의 문장은 우리라고 하고, 뒤의 문장은 바울 자신에 대해서 말을 한다. 바울이 율법으로 인해 죄 아래 팔리게 되었다고 말을 하는 것이다. 프뉴마티코스는 영적이라는 의미이고, 사르키코스는 육적인 의미다. 율법이 영적인 사람들이 지킬 수 있는 것임을 알았지만, 그들 스스로가 육적인 존재임을 알지 못했다는 의미가 된다. 바울 만이 자신이 육적인 존재임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주의에서 벗어나게 된다. 오늘날 교회에서 육적인 사람에 속하고 있으면서, 자신은 하나님을 잘 안다고 말을 한다. 하나님과 하나가 되려면 육적인 것은 죽고 영적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야만 하는 것이다. 

7장 15절『내가 행하는(카테르가조마이)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카테르가조마이는 힘써 수고하다 라는 의미이며, 현재시제 중수디포데이다. 날마다 그리고 자기 자신도 그런 수고를 했고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함을 보여준다. 바울이 현재시제를 쓴 것은 그런 일이 지금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초대교회 당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할례를 해야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이 율법을 지키고 있었지만 왜 그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께 합당한지 알지 못한 것이다. 그것은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을 통하여 바울을 속였기 때문이다. 

7장 16절『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토 노모)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토 노모는 율법이(주격)가아니라 율법에 관하여다. 토 노모는 여격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율법이 선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기능에 선한 것이 있다는 것이다. 율법에는 죄를 깨닫게 해 주는 기능이 있다고 말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율법으로는 죄를 극복할 수 없다. 그래서 복음이 필요한 것이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혼과 영과 골수를 쪼개기까지 하며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