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로마서 15장 1절『믿음이 강한(두나토이)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아두나톤)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두나토스의 복수형이 두나토이이다. 기본형은 두나마이로서 능력있는 자 라는 의미다. 반대로 아두나톤는 능력이 없는 자다. 아(부정)와 두나톤(능력)의 합성어이다. 먹는 것과 절기에 대해서 자유를 가지고 있는 자가 능력이 있는 자가 된다. 확정된 믿음을 소유한 자라는 것이다. 그런데, 믿음의 능력이 있는 자는 믿음의 능력이 없는 자를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믿음의 능력이 없는 자는 아직도 믿음이 확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형제들이 걸림돌이 된다면 그 형제를 위해서 자유를 행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기준은 형제에게 있는 것이다. 믿음의 능력이 있는 자는 먹을 수도 있고 먹지 않을 수도 있다. 

믿음의 능력을 소유자가 믿음의 능력이 없는 자의 약점을 담당해야 한다는 권면으로 읽기 쉽다. 그러면 믿음의 능력이 있는 자는 어떤 약점도 없고, 믿음의 능력이 없는 자는 대단히 문제가 있는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그리고 신앙생활의 궁극적인 목표가 믿음의 능력으로 여기게 될 수 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그 믿음을 바라보는 성도들의 반응이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다. 믿음의 능력으로 강하게 또는 약하게 반응할 뿐, 믿음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따라서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늘로부터 오는 믿음을 믿음의 능력이 있는 자로 이해하는 경우, 강한 믿음을 지니기 위해 어떤 노력도 불사해야 할 거 같은 유혹에 빠지게 된다. 내가 믿는 믿음은 의지에 의해 결정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에베소서 2장 8절에서『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한다. 믿음은 내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며, 나의 소유도 아니다. 그러니 자랑할 것이 아니다. 강한 믿음을 최고라고 말하지 않고, 선물로 받은 믿음을 통해 성도가 무엇을 해야 할지 다루고 있다. 나의 의지로 믿는 믿음을 부인하고, 성령의 능력으로 인도받는 믿음이 참 믿음인 것이다. 내가 믿는 믿음과 성령의 능력으로부터 오는 그리스도의 믿음은 서로 다른 것이다. 

믿음의 본질은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했다. 확정된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믿음은 그리스도의 믿음과 연합된 자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자는 평안과 화평을 추구하고 서로 교회를 세우게 된다. 믿음의 능력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집인 교회를 성령의 능력으로 세워나가는 자라는 것이다. 로마교회는 유대인과 로마인이 함께 있었다. 그들 상호간에는 어떤 전통(먹는 것, 절기 등)에 있어서 갈등이 많았다. 바울을 포함해서 믿음의 능력을 소유한 자가 믿음의 능력이 없는 자를 위해서 기쁨을 내려 놓는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교회를 세워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15장 2절『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아레스케토)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에이스 토 아가돈 프로스 오이코도멘) 할지니라』아레스케토는 명령법이다. 에이스(~을 향하여) 토 아가돈(가치있는) 프로스(~을 위한) 오이코도멘(집을 세우는)은 하나님의 집을 세우기 위한 가치있는 것을 향하는 것이다. 오이코도멘은 집을 세우는 건축을 의미한다. 

믿음은 이웃을 기쁘게 하고, 하나님의 집을 세우기 위한 가치있는 것을 향하는 도구라고 한다.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주님께서 자신을 기쁘게 하지 않고, 자신을 우리를 위해 내어주셨기에 인류가 소망을 품을 수 있었다. 믿음은 나의 만족과 기쁨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교회를 세워나가야 하는 도구여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죽어있던 영을 살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8장 29절에서『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을 기쁘게 한다는 말이다. 

15장 3절『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게그랖타이)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게그랖타이는 성경에 이미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시편 69편 7절에『내가 주를 위하여 비방을 받았사오니 수치가 나의 얼굴에 덮였나이다.』69편 9절에『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비방하는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나 라는 분은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하나님을 향하는 비방이 그리스도에게 미친다는 것이다. 이 내용은 그리스도의 환란을 예표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환란은 십자가의 죽음이다. 십자가의 죽음은 그리스도 자신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빌립보서 2장 6-8절에서도 같은 말을 한다.『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고린도후서 8장 9절에서『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15장 4절『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디다스칼리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휘포모네스)로 또는(카이) 성경의 위로(파라클레데오스)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디다스칼리안은 가르침이다. 기록된 말씀은 앞에서 언급한 시편의 기록인데, 이 말씀은 바로 우리를 위한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시편 69편의 내용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하여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 11절에서『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라고 말한다. 구약성경의 기록이 나로 인하여 기록된 것으로 말한다. 구약성경의 기록이 모두 그리스도와 관련된 것이고 그리고 이 말씀들이 나에게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휘포모네스는 심령 속의 지성소에 머무는 인내를 의미한다. 파라클레데오스는 격려하다는 말이다. 카이를 또는 이라고 번역했는데, 또는 둘 중의 하나를 의미하지만, 카이는 그리고 라는 의미다. 성경의 기록들을 바탕에 두고 심령 속에서 강림하시는 주님을 기다리고 또 주님께서 임재하셔서 격려의 말씀을 해 주실 것을 통해서 소망한다는 말이다. 대부분 교회에서는 기록된 성경 말씀을 통해서 교훈들이 인내와 위로의 소망을 갖게 한다고 말을 한다. 그러나 휘포모네는 그런 의미가 아닌 것이다. 에베소서 2장 12절에서『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5장 5절『이제 인내(휘포모네스)와 위로(파라클레데오스)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카타 크리스톤 예수) 서로 뜻이(프로네인 엔 알렐로이스) 같게(토 아우토) 하여주사(디도에)』심령 속에 강림하시고 격려하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프로네인 엔 알렐로이스는 서로 한 마음이 되게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토 아우토는 한글 개역개정에는 같게 라고 번역되었는데, 이는 바울이 하나님과 같은 마음이라는 것이다. 디도에는 기본형이 디도미로서 소원한다는 것이다. 심령 속에 임재하시고 격려하시는 호 로고스께서 너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한 마음이 되기를 소원한다는 말이다. 그 소원은 하나님과 바울이 같다는 것이다. 카타 크리스톤 예수에서 카타는 본받아가 아니라 『~을 따라』이다.  

서로 뜻이 하나가 된다는 것, 한마음과 한입이 된다는 것은 오직 본질에 충실할 때 가능한 일이다. 초대교회는 한마음과 한 뜻을 지닌 공동체였다. 그들 가운데도 감정충돌과 갈등이 있었다. 이단의 공격도 있었고, 논쟁도 있었다. 그때마다 그들은 복음 앞에 한마음과 한 뜻을 품기 위해 주저하지 않았다. 그들은 대화했고, 기도했고 주님을 본받으며 뜻을 같이하였다. 같은 목적을 지니게 된 것이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혼과 영과 골수를 쪼개기까지 하며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