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
사도행전 17장 1-3절『그들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에이오도스)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데살로니가에는 빌립보와 달리 유대인의 회당이 있었다. 에이오도스는 방식이다. 바울이 늘 하던 자신 만의 방식이 있는 것이다. 회당이 있는 곳에서는 의례히 거기 들어가 유대인들을 상대로 먼저 복음을 전하는 것이 바울의 전도방법이었다. 회당은 성전이 아니다.
바울은 거기서 세 번의 안식일에 구약성경을 가지고 강론을 했다. 바울이 그곳에서 세번이나 강론할 수 있었던 것은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비록 개종한 헬라인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유대인 디아스포라로서 메시아(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그의 강론은 성경을 읽고 그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정복자의 통치와 억압의 굴레에서 그들을 해방시켜줄 구원자로, 오랫동안 기다려온 메시야를 지칭한다. 그러기에 그런 메시야가 십자가에 달려 죽는다는 것은 유대인들에게는 받아들일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 유대인들에게 자신들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나사렛 예수가 바로 그 그리스도라고 말하려면 왜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야 했는지를 설명해주어야 했다.
17장 4-9절『그 중의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나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불량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하게 하여 야손의 집에 침입하여 그들을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발견하지 못하매 야손과 몇 형제들을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야손이 그들을 맞아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하니 무리와 읍장들이 이 말을 듣고 소동하여 야손과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보석금을 받고 놓아 주니라』
회당에 함께 있던 수많은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많은 귀부인들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게 되었다. 유대인들이 있는 곳에서는 언제나 그랬듯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믿지 않는 유대인들의 반발과 그들의 선동에 따른 이방인들의 박해가 데살로니가에서도 어김없이 일어났다. 많은 경건한 헬라인들과 귀부인들이 바울 일행의 말을 따르게 되자 이를 시기한 유대인들이 시장이나 광장 등에서 불러 모은 불량배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나타나 성 안에서 소동을 일으켰다.
그들은 바울 일행을 영접하여 머물게 한 야손이란 사람의 집에 침입해서 바울 일행을 찾아 끌어내려 했고 그들을 발견하지 못하자 야손과 그 형제들을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 질러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라고 했다. 다른 임금을 인정한다는 것은 곧 로마 황제에 대한 반역죄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 바람에 무리와 읍장들이 다 이 말을 듣고 야단법석을 떨었으며 야손과 그 나머지 사람들은 보석금을 받고서야 놓아 주었다.
17장 10-12절『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그들이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톤 로곤)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데살로니가에서 믿게 된 형제들의 도움으로 불량배들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바울과 실라는 데살로니가에서 베뢰아로 보내졌다. 또 한 번 위기를 모면한 바울 일행이었지만 어디 가나 전도를 해야 하는 그들의 열심은 지칠 줄을 몰랐다. 그들은 베뢰아에 가서도 역시 유대인의 회당으로 들어가 말씀을 전했다. 베뢰아 사람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바울이 전하는 호 로고스에 대한 말씀을 듣고 그들은 호 로고스의 참됨을 성경에 쓰인 말씀으로 확인하려고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는 가운데 많은 유대인과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들이 믿게 되었다. 호 로고스를 받아드린다는 것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시고, 그 분이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여 성도의 심령 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믿는 것이다.
바울이 베뢰아에서도 호 로고스의 말씀을 전한다는 소문이 전해지자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은 다시 베뢰아까지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을 일으켰고, 그 때문에 바울은 실라와 디모데하고는 나중에 다시 합류하기로 하고 베뢰아에서 믿게 된 형제들의 인도를 받아 아덴으로 가게 되었다.
17장 13-15절『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은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베뢰아에서도 전하는 줄을 알고 거기도 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하게 하거늘 형제들이 곧 바울을 내보내어 바다까지 가게 하되 실라와 디모데는 아직 거기 머물더라 바울을 인도하는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아덴까지 이르러 그에게서 실라와 디모데를 자기에게로 속히 오게 하라는 명령을 받고 떠나니라』 바울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관해 듣고는 베뢰아의 많은 헬라인들이 믿었다. 헬라인들은 철학적인 사변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대단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든가,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든지 하는 말도 되지 않는 주장을 일축해버리지 않고 믿고 받아들였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여기서도 유대인들이 소동을 벌인 것이다. 바울은 바다라는 곳을 거쳐서 아덴(아테네)에 이르게 된다.
17장 16-18절『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바울이 아테네에서 실라와 디모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아테네라는 도시의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이 분하여졌다. 바울은 그 때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시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했다. 철학자들과도 쟁론했다. 그들은 바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쟁론의 핵심은 인간의 죄의 문제가 되었을 것이다. 오직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아니면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데, 초점이 맞추어졌을 것이고, 철학자들은 죄의 문제가 인간 내면에서 일어나는 의식적 무의식적 구조에서 일어난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그 해결방법으로 그들 스스로가 만든 어떤 논리로 해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와 철학자들은 서로 연결점이 없는 쟁론화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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