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풍병으로 침상 위에 누운 지 여덟 해라

사도행전 9장 32절『그 때에 베드로가 사방으로 두루 다니다가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도 내려갔더니』그 때는 바로 사울이 회심하고 복음을 전하다가 다메섹과 예루살렘을 거쳐 자신의 고향인 다소로 낙향한 그때를 말한다. 그때 베드로는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 내려갔다고 성경은 기록한다. 룻다에서 중풍병에 걸린 애니아를 고쳐주는 사건을 통해서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성령께서 베드로를 룻다로 이끄셨다고 추측할 수 있다.

9장 33-35절『거기서 애니아라 하는 사람을 만나매 그는 중풍병으로 침상 위에 누운 지 여덟 해라 베드로가 이르되(에이펜)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대 곧 일어나니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오니라』 병상에 누워있는 애니아와 그를 간병해야 하는 가족들에게 8년이란 세월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룻다에서 애니아를 본 순간, 베드로는 애니아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다. 베드로는 애니아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라고 했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고 했다. 호 로고스이신 주님이 순간적으로 베드로를 통해서 그렇게 하도록 하여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에이펜은 아오리스트 시제다. 

주님은 애니아의 중풍병을 치료해 주시면서, 그 자리를 정리하라고 말씀하셨다. 애니아의 삶의 자리를 정리한다는 것은 곧 애니아의 육신의 병을 고쳐주시는 것과 동시에 영의 몸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육신의 병고침과 더불어 함께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바로 영적으로 새로워져야 함이다. 육신의 병은 치료되었으나, 영적인 부분이 여전히 중풍병으로 누워있던 때와 동일하다면 육신의 병이 고침받은 것이 진정한 고침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어쩌면 육신의 병보다 더 큰 문제는 영이 살아나는 것이다. 

9장 36-39절『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누이니라 룻다가 욥바에서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와 달라고 간청하여 베드로가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가서 이르매 그들이 데리고 다락방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이거늘』 

이어서 베드로는 룻다에서 가까운 욥바로 건너갔다. 이때 베드로가 베드로가 욥바에 간 이유는 죽은 다비다를 다시 살리기 위해서였다. 다비다는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은 사람이었다. 그런 다비다(도르가)가 죽었을 때, 그의 죽음을 슬퍼한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다비다가 살아 생전에 만들어 주었던 속옷과 겉옷들을 보여주었다. 

9장 40-42절『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프로세웈사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아나스테디) 하니(에이펜)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 들여 그가 살아난 것을 보이니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프로세웈사토는 문법적으로 중간 디포테이다. 베드로가 죽은 자를 일으키고자 간 것이 아니었는데, 다비다가 죽은 상황에서 주변에서 슬퍼하고 많은 사람들이 모이므로 베드로는 순간 의지를 가지고 주님께 간청 기도를 한 것이다. 베드로는 심령 속에 임재하시는 호 로고스와 기도를 통해 대화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주의 음성을 듣고 죽은 자를 일으키는 것이다. 프로슈케의 기도를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다 내 보었다. 프로슈케의 기도는 심령 속의 지성소의 기도이기 때문에 주변에 사람들이 있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아나스테디 에이펜은 아오리스트 시제다. 순간 성령의 능력으로 말하는 것이다. 

베드로는 룻다의 애니아를 고치고, 욥바의 다비다를 살렸다. 룻다의 애니아는 욥바의 다비다와 다른 점이 많았다. 먼저 욥바의 다비다는 여제자로 소개하고 있는데 반해 룻다의 애니아는 그런 소개가 없다. 믿음이 없는 사람일 수 있고 혹 믿음이 있을지라도 열심있는 신앙의 소유자는 아닐 수 있다. 또한 욥바의 다비다는 선행과 구제하는 일에 열심인 사람이었는데 반해 룻다의 애니아는 그런 소개가 없다. 베드로를 통해 치유의 역사를 경험한 사람들은 그 치유의 근거가 그 자신에게 있는 게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치유의 근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었지, 사람의 선행이나 믿음에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룻다의 애니아, 욥바의 다비다를 통해 어떤 결과가 있었는지를 성경은 밝혀주고 있다.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왔다고 말하고,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었다고 전한다. 성경은 주께로 돌아오는 역사, 주를 믿는 이들이 많아지는 역사가 일어난 곳마다 주님이 함께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9장 43절『베드로가 욥바에 여러 날 있어(에게네토) 시몬이라 하는 무두장이의 집에서 머무니라(메이나이)』에게네토나 메이나이는 아오리스트 시제를 사용하고 있다. 베드로가 어떤 계획으로 이렇게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성령의 인도를 따라 그렇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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