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마가복음 6장 1-13절)

6장 1-2절『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따르니라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예수님께서는 네 가지 이적을 행하신 후에 가버나움에서 떠나 제자들과 함께 고향으로 가셨다. 여기서 말하는 고향은 아마도 나사렛일 것이다. 마태복음 13장 53-54절에 보면


『예수께서 이 모든 비유를 마치신 후에 거기를 떠나서 고향으로 돌아가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저희가 놀라 가로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뇨』라고 했다. 이 말씀을 볼 때 마가복음에서 오늘 사건을 기술하는 것과 마태복음에서 기술하는 사건이 시간적 차이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마가복음에서는 네 가지 하나님 나라 비유를 말씀하신 후에 네 가지 이적을 행하신 것을 기술하고 있다. 그런 뒤에 이 사건을 기술하고 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비유를 말씀하신 후에 바로 이 사건을 기술하고 있다. 이 두 기록은 같은 시간대에 있은 동일한 사건을 기술하고 있다.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마태는 예수님께서 여러 이적을 행하신 것보다 가버나움에서 집중적으로 하나님 나라에 대해 여러 가지 비유로 말씀하신 것을 나중에 기술하고 있다. 나사렛으로 가시기 직전의 마지막 행적으로 다루어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나사렛으로 돌아오신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 들어가셔서 가르치셨습니다. 마가는 그 가르치신 내용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누가복음 4장에 예수님께서 처음 나사렛에서 배척 받으셨을 때 회당에서 가르치신 내용을 보면 그 내용이 짐작된다. 


누가복음 4장 18-19절을 보면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고 했다. 이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인용하여 죄와 그 형벌인 죽음으로 인해 신음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예언하신 메시아가 오심으로 이제 그들에게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여 주시는 은혜의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하는 복음을 증거하셨다. 이 말씀을 인용하여 하나님 나라 복음을 증거 하셨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말씀을 들고 놀랐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본래 자기 고향 사람인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지혜로운 말씀과 이적을 행하시는 것을 보고 놀랐던 것이다. 나사렛 사람들은 이번에도 전에 예수님을 대하던 때와 전혀 달라진게 없었다. 여전히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불신앙적인 태도를 보였다.


6장 3-6절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에스칸달리존토 엔 아우토)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 하시며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 


육의 눈으로 바라보면 배척하는 일이 일어난다. 그러나 영의 눈으로 바라보면 표적과 기사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알게 되는 것이다. 에스칸달리존토 엔 아우토는 장애물에 걸려넘어진 것을 의미한다. 그들이 장애물에 걸려 넘어져 그 분(예수님)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는 말이다. 장애물은 그들이 예수님의 육적인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지 못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고향 사람들이 자신을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겼다. 여기서 『이상히 여기셨다』라는 말은 헬라어 성경을 보면 『에다우마젠』이라는 단어인데 마가복음 5장 20절에서 군대 귀신 들렸던 자가 예수님을 통해서 고침을 받은 후에 데가볼리 사람들에게 가서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행하신 큰 일을 전하였을 때 모든 사람이 『기이히 여겼다』라고 했는데 그때 쓰인 단어와 동일하다. 데가볼리 사람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놀라운 능력의 역사를 체험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큰 일로 인해 기이히 여길 뿐 예수님을 믿지는 않았다. 그들은 예수님께 데가볼리에서 떠날 것을 요구하였다. 데가볼리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행하신 큰 일로 인해 기이히 여겼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은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고향에서 배척을 받으셨다. 예수님께서는 고향 나사렛 사람들의 완고한 불신을 이상히 여기셨다.


이 사건은 제자들에게 분명히 중요한 교훈이 되었을 것이다. 그들 자신들도 앞으로 직접 전도 사역을 감당할 때에 이런 배척을 경험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두 번째로 고향 나사렛을 떠나셨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렛을 떠나 여러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가르치셨다. 나사렛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촌을 돌면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가르치셨다. 예수님께서 고향에서 배척 받으신 후에 고향 나사렛 주변의 모든 마을을 돌면서 하나님의 복음을 가르치신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들을 부르사 둘씩 둘씩 전도 여행을 보내셨다. 이러한 내용들은 앞으로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배척하고 이방인들이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드릴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6장 7-9절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 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배낭이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하시고』 열두 제자를 부르시고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셨다. 제자에게 권능을 주시는 것은 오늘날도 임마누엘 신앙이 되는 자에게 권능을 주시는 것과 동일하다. 


마태복음에서는 제자들은 가면서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전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천국복음을 전하는데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쫒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했다. 제자들이 이러한 권능을 행한 것은 자기들의 능력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권능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권능을 행한 것은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증거 한 것이다. 


음을 전하는 자의 모습을 보여주신다. 합당한 대가로 먹을 정도의 것 외에는 돈을 챙기려고 하지 말하는 것이다. 아무나 찾아가지 말고 합당한 자를 찾아가라는 것이다. 진주와 같은 말씀을 구걸하듯이 복음을 전하지 말라는 것이다. 합당한 자는 복음을 전했을 때, 씨뿌리는 비유처럼 마음의 밭을 갈 수 있는 자가 되는 것이다. 마음밭이 굳어진 자는 합당하지 못한 자가 된다. 


6장 10-13절


『또 이르시되 어디서든지 누구의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곳을 떠나기까지 거기 유하라 어느 곳에서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거기서 나갈 때에 발 아래 먼지를 떨어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 


제자들이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이 당시의 유대인들이 다른 사람의 집에 가면 그 집을 위하여 축복을 했다. 평안은 헬라어로 에이레네(하나님과 화평)라는 말이다. 히브리어로는 샬롬이라고 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서 하나님의 언약을 배반하면 샬롬이 주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온갖 재앙이 다 일어난다. 이러한 과정에서 샬롬 곧 평안은 이들에게 복음의 소식이다. 그런데 이 평안을 제자들이 가는 곳마다 전하라고 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거저 받은 것을 거저 주라는 가장 중요한 내용이 바로 평안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 관계가 깨어졌기에 하나님과 평안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하나님과 자기 백성사이에 평안을 주시는 화목제물이 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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