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한복음 1장 29절『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아이온)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호 암노스)이로다』아이온은 들어올리다 라는 의미다. 세상에서 꿈쩍도 않는 죄를 들어올려서 이동시키는 개념이다. 호 암노스는 그 어린양이다. 즉 희생제물 어린양이다. 


1장 30절『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엠프로스덴)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엠프로스덴 무 게고넨)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엠프로스덴 무 게고넨은 나보다 앞서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로) 되어졌다는 말이다. 앞서라는 엠프로스덴은 시간적인 개념이다. 호티(왜냐하면) 프로토스(먼저) 무(나의) 엔(존재했다), 여기서 프로토스는 질서적으로 앞선 것을 의미한다. 나보다 먼저 된 자라는 말은 아르케(우두머리)라는 말이다. 그 분은 모든 피조물보다 앞서 존재했던 분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상속자로서 존재했다는 말이다. 호 로고스는 처음부터 먼저 계셨으므로 왕이라는 개념이 된다. 첫사람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왕으로 존재한 자라는 것이다. 그리고 현재적으로도 성도는 심령 속에서 왕으로 모시고 있다. 


1장 31절『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 나타내려(파네로데) 함이라 하니라』세례요한을 포함해서 모든 사람들이 독생자 예수를 알아보지 못한 것을 의미한다. 파네로데는 3인칭 단수 아오리스트 중간태로서 그가 나타내지도록 이라는 의미다. 세례요한이 세례를 주는 이유는 그가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이스라엘에 나타내지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에 의해서 하나님이 아들이라는 것이 나타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렇게 되어진다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를 증거한다고 해서 그 듣는 사람이 예수를 알게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예수에 대해서 듣고, 예수와의 체험적 관계를 통해서 알게된다는 것이다. 


1장 32절『요한이 또 증언하여(에마르튀레센) 이르되 내가 보매 성령(토 프뉴마)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에메이넨)』에마르튀레센은 아오리스트 시제이다. 순간 성령으로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프뉴마는 영이지만 정관사 토가 붙어서 성령을 의미하게 된다. 에메이넨도 아오리스트 시제이다. 세례요한은 성령이 내려오는 것을 보았지만 누구에게 내려올지는 알지 못했다. 


1장 33-34절『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투 데우)의 아들(호 휘오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하니라』하나님이 세례요한에게 미리 하신 말씀이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성령이 예수님에게로, 그리고 예수님으로부터 제자들에게 성령이 부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제자들의 심령 속에서 임재하신 호 로고스(그리스도)가 그 제자의 손을 통해서 다시 성령세례를 주는 것이다. 그래서 세례요한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게되고 증언했던 것이다. 투 데우는 성부 하나님이다. 호 휘오스는 그 아들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만일 정관사가 없이 휘오스만 있다면, 성령세례 받은 성도를 의미하게 된다. 


물세례와 성령세례는 다른 개념이다. 물세례는 하나님께 대하여 죽어야 할 자라는 것을 깨닫고 물에서 죽고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는 개념이다. 즉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이것이 먼저 마음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이것을 마음의 할례라 한다. 그래서 물세례라는 의식과 연결된다. 그런데, 성령세례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 중에서 사도적인 소명을 받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특별한 은혜인 것이다. 그래서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은 특별한 은사를 나타낸다. 방언을 하고, 표적과 기사를 나타내고 예언을 하며 병을 고치는 것이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지만, 성령세례를 받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세례를 받는 것이 중요하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날 때 성령은 인간의 심령 속에서 내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거듭나다라는 헬라어 표현은 하늘에서 태어나다라는 표현이다. 그래서 속사람이라고 말로 표현한다. 그러나 성령세례는 외적으로 성도의 머리 위에서 역사하신다. 그래서 보혜사(돕는 자) 성령이라고 표현한다. 성령 충만도 성령세례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성령세례는 기름부음을 받는 것으로 특별한 사역자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령세례를 주는 장면이 사도행전을 통해서 볼 수 있다. 성령세례를 받았지만 성령의 능력이 약해질 수도 있고 없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성령 충만을 얻기를 프로슈케 기도를 통해서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1장 35절『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팔린 에이스테케이)』 팔린 에이스테케이는 다시 서있었다 라는 표현이다. 세례요한이 제자들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만나기 위해 서 있었다는 말이다. 


1장 36절『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엠블랲사스)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엠블랲사스는 주시하다라는 의미로서, 엠은 ~ 안에 라는 말이다. 즉 하나님 안에서 예수를 주시하다라는 말이다. 기독교의 핵심은 십자가와 부활이다. 어린양은 십자가의 죽으심을 예표한다. 


1장 37절『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에콜뤼데산 토 예수)』에콜뤼데산 토 예수에서 토는 여격이다. 그래서 토 예수는 단순히 그 예수를 따라갔다는 그 의미가 아니라 예수와 관계를 맺기 위해서 예수를 따라갔다는 것이다. 즉 요한의 두 제자가 예수의 제자가 되기 위해 따라갔다는 말이다. 왜 따라갔는가에 대해서는 두 제자가 그의 말을 순간 들었고 깨달음이 왔다는 것이다. 


1장 38절『예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데아시메노스)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제테이테) 이르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푸 메네이스)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데아시메노스는 근접하여 보시고 라는 말이다. 예수님이 두 사람을 가까이에서 찬찬히 자세하게 바라보았다는 말이다. 제테이테는 추구하다라는 의미다. 어떤 비전이 함축되어 있다. 무슨 목적으로 나를 따라 오려고 하는가 라는 의미다. 푸 메네이스는 어디에 머물고 있습니까 라는 질문이다. 


1장 39절『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에르케스데) 보라(카이 옾세스데)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에르케스데 카이 옾세스데는『너희 자신을 오게하라 그러면 보게 할 것이다.』예수님께 나아가고 보는 모든 것이 나 자신에게 달려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열시는 오늘날 오후 네시 경에 해당된다. 예수님이 묵고 있었던 집에서 하루를 같이 보내고 오후까지 있었던 것이다. 


1장 40-41절『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그가 먼저(프로톤)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프로톤은 시간적 개념의 먼저가 아니라, 앞서 있는 자를 의미한다. 즉 먼저인 그가 시몬을 찾았다는 것이다. 안드레가 베드로의 형임을 알 수 있다. 시몬 베드로는 메시야를 찾기 위해 노력한 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장 42절『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시몬이 베드로가 되는 순간이다. 그가 메시야를 찾다가 드디어 만나게 된 것을 말해준다. 오늘날도 그리스도를 찾는 자가 예수를 만나게 될 것이다. 예수가 누구인지 정말 간절히 그리스도를 찾는 자에게 하나님이 그를 만나주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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