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요한복음 1장 15절『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마르튀레이) 외쳐(케크라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후토스 엔 호 에이폰)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엠프로스덴 무 게고넨)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호티 프로토스 무 엔)』마르튀레이는 증거한다는 것인데, 어떤 사실을 밝히드러내는 것이다. 케크라겐은 현재완료로서 그 동안 계속 외쳐왔다는 것이다. 후토스 엔 호 에이폰에서 호는 관계대명사이다. 내가 전에 말했던 이 사람(후토스)이다. 에이폰은 아오리스트 시제이다. 순간적으로 말한 사실을 의미한다.
엠프로스덴 무 게고넨은 나보다 앞서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로) 되어졌다는 말이다. 앞서라는 엠프로스덴은 시간적인 개념이다. 호티(왜냐하면) 프로토스(먼저) 무(나의) 엔(존재했다), 여기서 프로토스는 질서적으로 앞선 것을 의미한다. 나보다 먼저 된 자라는 말은 아르케(우두머리)라는 말이다. 그 분은 모든 피조물보다 앞서 존재했던 분이라는 말이다. 골로새서 1장 15절에서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호 로고스는 처음부터 먼저 계셨으므로 왕이라는 개념이 된다. 첫사람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왕으로 존재한 자라는 것이다. 그리고 현재적으로도 성도는 심령 속에서 왕으로 모시고 있다.
1장 16절『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플레로마토스)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카린 안티 카리스토스)』플레로마토스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는 의미다. 성도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야 할 이유는 그 분으로부터 은혜와 진리의 충만함을 받으려는 것이다. 카린 안티 카리스토스는 은혜를 대신하는 은혜이다. 안티를 위에라고 번역했으나, 안티는 반대되는 의미다. 앞에 있는 은혜는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통한 은혜이고, 뒤의 은혜는 율법을 통한 은혜이다. 즉 율법을 대신하는 은혜로다 라는 말이다.
1장 17절『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디아) 온 것이라(에게네토)』디아는 ~을 통하여 라는 의미다. 디아+소유격 명사가 오면 ~를 통하여 라는 의미가 되고, 목적격이 오면 말미암아가 된다. 말미암아라는 말은 원인을 나타내는 것이다. 읽는 독자와는 직접적 관계를 맺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통하여 라는 말은 직접적인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에게네토는 영어의 become과 같은 의미인데, 중간 디포테(능동태)로서 되게 한다는 것이다. 진리와 율법과 대조되고, 모세와 예수와 대조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자녀 또는 아들로 되게 한다는 것이다. ~통하여 라는 말은 그냥 생각으로 통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이 성도의 심령 안으로 들어오고, 성도 역시 그 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프로슈케의 기도를 하는 것이다. 프로슈케의 대표적인 기도가 바로 주기도문이다.
1장 18절『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에이스 톤 콜폰 투 피트로스) 독생하신(모노게네스)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에케이노스)』 에이스 톤 콜폰 투 피트로스는『그 아버지 그 품 속으로』 라는 의미다. 독생하신 분은 아버지의 품속에 있다는 것이다. 즉 성부와 성자는 하나인 관계라는 것을 보여준다. 모노게누스는 모노(홀로 하나)와 기노스코(~되다)의 합성어이다. 홀로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된 것을 의미한다. 그 분은 원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피조물은 홀로 상속자가 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된다. 에케이노스는 리더가 되게 했다는 것이다.
1장 19절『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아페스테일란) 네가 누구냐(수 티스 에이) 물을 때에 요한의 증언이 이러하니라』 수 티스 에이는 너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다. 이 말 속에는 너가 그리스도인가 라는 말이 함축되어 있다. 아페스테일란은 보내다 라는 말인데, 사도는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의미로 아포스텔로이라고 한다. 이는 문자적으로 국가의 왕이 다른 나라에 대사로 파견하는 것을 의미한다.
1장 20절『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호몰로게센)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호몰로게센)』호몰로게센은 고백했다는 아오리스트 시제이다. 성령의 감동으로 순간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1장 21-22절『또 묻되 그러면 누구냐 네가 엘리야냐 이르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펨프사신)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교회 사람들은 세례요한을 마지막 선지자로 여기고 있으나, 여기는 분명히 아니라고 대답한다. 바리새인들이 세례요한의 정체가 궁금한 것이다. 펨프사신의 기본형은 펨포이다. 펨포는 심부름을 보낸 자를 의미한다. 19절에서 유대인들이 대제사장과 서기관을 대사로 보내어 물어보게 했는데, 오히려 자신은 심부름 왔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는 23절에서 세례요한은 하나님이 보내신 대사로서 말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오늘날 사도직분을 갖는 자들은 하나님나라의 대사라는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1장 23절『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유두니테)고 광야에서 외치는(보온테스)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유두니테는 주님께서 사람들에게 가는 길을 곧게 하라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글로 표현하였다. 그래서 복잡하고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직접 말로 전하면 쉽다. 왜냐하면 길이 구불구불하지 않고 곧게 되므로 가기 쉬운 것처럼 글보다 말이 곧은 것이다.
보온테스는 외치는 자의 라는 의미이다. 문법적으로는 수식하는 분사이다. 소리를 수식한다. 세례요한은 자신이 소리라고 한다. 그런데, 외치는 자는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그리스도가 광야에서 외치고 있는데, 그 목소리가 자신이라는 말이다. 광야는 세상을 의미한다.
외치는 자(그리스도)의 소리(세례요한)는 하나님(그리스도)이 세례요한을 세상에 대사를 보내어 하나님 말씀을 직접 전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도는 하나님 말씀을 전하라고 보내심을 받은 자다. 에베소서 4장 11절에서『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주님이 주시는 은사에 따라 직분을 맡기신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도 사도적인 직분을 가지고 말씀을 선포하는 자가 있는 것이다. 사도행전 1장 8절에서『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말씀을 증거하는 자는 사도적인 직분을 갖게 된다.
1장 24-25절『그들은 바리새인들이 보낸(아페스탈메노이) 자라 또 물어 이르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세례를 베푸느냐』아페스탈메노이는 대사로 보낸 자라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그들은 유대인들의 심부름 왔다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몇가지 개인적인 질문을 하는 것이다. 그들은 세례요한에게 왜 너는 신령한 자도 아닌데, 세례를 주느냐 라고 묻는 것이다.
1장 26-28절『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우크 오이다테)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하더라(우크 에이미 에고 앜시오스 히나 뤼소 아우투 톤 히만타 투 휘포데마토스) 이 일은 요한이 세례 베풀던 곳 요단 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일어난 일이니라』 우크 오이다테는 깨달아 알지 못하는 의미다. 즉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우크 에이미 에고 앜시오스 히나 뤼소 아우투 톤 히만타 투 휘포데마토스)는 번역하면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만한 가치도 없는 자이다 라는 것이다. 세례요한이 주는 물세례와 예수님이 주는 성령세례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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