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요한복음 11장 17절『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죽은 자는 어둠에 있는 자임을 의미한다. 구원의 시작은『자신이 어둠 속에 있구나』라는 것을 깨닫는데서 부터 시작한다. 전에는 영적으로 죽었지만 살아나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 단순히 부활을 믿는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영적으로 살아서 믿지 않으면 생명이 없다. 영이 죽은 자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 영이 곧 생명이라는 말이다.
11장 18-20절『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쯤 되매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에쿠센) 곧 나가 맞이하되(휘펜테센)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많은 유대인들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좋은 자들이다. 에쿠센은 아오리스트 시제이다. 마르다가 사람의 말을 들은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음성을 들은 것이다. 성령의 음성이 집에 그대로 앉아서 기다리라는 것이다. 휘펜테센은 휘포와 안티라는 동사의 합성이다. 이 말은 반대하는 의미를 갖는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빨리 오셔야 하는데, 지체하고, 나사로가 죽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성령의 음성에 반대해서 집에 대기하지 못하고 예수님을 맞으러 나간 것이다. 마리아는 집에서 머물렀다.
심령 속에 울리는 음성은 세가지가 있다. 하나님의 음성과 자기 생각과 마귀의 음성이다. 영적 분별이 필요하다. 그 음성이 어떤 방향으로 나가는가를 잘 살펴보아야만 한다. 하나님 나라인가 아니면 세상인가를 생각하는 것이다. 만일 어떤 음성이 들렸는데, 세상적인 것이라면 마귀의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하와가 마귀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 처럼 될 수 있다고 선악과를 먹은 것이다.
11장 21-22절『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마르다의 신앙은 오늘날 많은 교회 사람들의 신앙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교회 안에 마르다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자가 많을 것이다.
11장 23-24절『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아나스테세나이)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아나스테세나이는 부활을 의미하는데, 미래 시제로서 죽은 후에 부활을 의미한다. 예수님도 죽은 후의 부활을 말하므로 마르다도 이에 호응하는 것이다. 이것은 교리에 해당한다. 교리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냥 지식에 불과하다.
예수님이『너의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와『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의 차이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다. 24절에서『내가 바로 부활이고 생명인데,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고 했다. 사람들은 이 말을『죽은 후에 언젠가 다시 살아나겠지』라고 생각한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죽음은 과거형이다. 영어로 보면『though he were dead, yet shall he live』나를 믿는 자는 죽었었지만, 살겠다는 말이다. 주님을 믿는 자가 전에는 영적으로 죽었지만 살아난다는 말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영적으로 죽어있다. 그래서 영적으로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말이다.
문자적으로 번역을 하니까 내용이 이상해진 것이다. 영적으로 살아서 믿어야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말이다. 영적으로 살지도 않았는데, 자신은 예수를 믿는다고 모두 생명의 부활로 이어진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문자적으로 번역한 것을 바라보는 자는『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를 언젠가 육체적으로 죽으면, 다시 부활한다는 단순 논리로 생각한다. 육체적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이미 죽은 자를 말한다. 이 말을 문자적으로 이해한다면『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라고 했는데,『살아서 믿는 자』라는 의미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앞의 문장과 뒤의 문장은 연결되어 있다.『믿는 자는 전에는 영적으로 죽었지만 살아나고, 영적으로 살아서 믿으므로 영생한다』는 말씀이다. 영이 살아나서 믿어야 영생을 얻는다.
11장 25-26절『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이 곧 부활이요 생명인데, 육이 죽으면 당연히 부활이 있지만, 살아서 부활의 믿음 속으로 들어가는 자는 비록 언젠가 육이 죽지만 이 땅에서 영생을 누리면서 살아간다는 말이다. 현재적인 부활을 누리지 못하는 자는 영적으로 여전히 어둠에 있는 자라는 것을 보여주신다. 마르다는 현재적이 아닌, 육이 죽은 후 미래 마지막 날 부활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현재적이다. 죄에 대해서도『언젠가 내 죄가 사하심을 받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현재적인 죄의 사하심이다. 믿음은 지금이다.
예수님이 마르다에게 말씀하시는 것은『나는 항상 부활이요 생명이야, 나를 믿는 자는 영이 죽었었지만 살아나고, 영이 살아나면 하늘로 부터 오는 믿음의 선물을 받아 영원히 죽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 말씀을 육의 관점에서 보면『나를 믿는 자는 육이 죽지만 언젠가 살아나고, 육이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뜻이 된다. 문장의 구조가 대단히 어색하다. 성경의 말씀은 영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육의 방향으로 돌리고 있다.
11장 27절『이르되(레게이)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레게이는 현재시제이다. 현재시제라는 것은 마르다가 자기의 생각으로 말하는 것을 표현한다. 아오리스트 시제는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마르다는 신앙이 깊은 여인이지만, 순간 순간 자신의 생각대로 행동하는 여자를 나타낸다.
그리고 26절에서 예수님이『이것을 믿느냐』라고 하셨다. 그런데 마르다가 답하였다.『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이 고백은 성경 지식으로 아는 말이다. 이 고백은 예수님과 영적 교제가 이루어지지 못하는 고백이다. 자기가 원하는 생각을 예수님께 주입하는 것이다. 마르다는 예수를 믿었지만 예수님은 마르다와 대화가 되지 않는 것이다. 마지막 때 부활은 생명의 부활로 나가지 못하면 심판의 부활로 나갈 것이다. 영적으로 죽었지만 예수님으로 인하여 영적으로 살아나야만 생명을 얻게 된다. 다 부활한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예수를 믿건 안믿건 마지막 때는 다 부활한다.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아닌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간다.
11장 28-30절『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자매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에이푸사)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에쿠센) 급히 일어나(에게르데) 예수께 나아가매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가 맞이했던 곳에 그대로 계시더라』에이푸사는 아오리스트 시제를 사용했다. 에쿠센은 마르다의 말을 들은 후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이다. 에게르데는 아오리스트 시제, 수동태로서 순간 일어나진 것이다.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