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나라

사도행전 9장 33-35절『거기서 애니아라 하는 사람을 만나매 그는 중풍병으로 침상 위에 누운 지 여덟 해라 베드로가 이르되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한대 곧 일어나니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오니라』 


중풍병으로 번역된 파라렐뤼메노스(παραλελυμένος)는 옆으로 늘어지다, 약한, 중풍병 등의 의미가 있다. 예수님이 중풍병을 고치는 장면이 마가복음 2장 3-12절에서 소개되는데, 예수님이 그 환자에게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라고 말을 하는 것이다. 


누가복음5장 21절에서는『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생각하여 이르되 이 신성 모독 하는 자가 누구냐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중풍병자에게『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중풍병과 죄는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중풍병자는 스스로 움직일 수 없어서, 다른 사람이 도와주지 않으면 움직일 수 없는 그런 상태였다. 중풍환자의 영적인 의미도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도와주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자를 의미한다. 


애니아라는 사람은 중풍병으로 침상 위에 누운지 여덟 해라고 했다. 단순히 팔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고통을 당하는 모습만 생각한다면 영적인 의미를 놓칠 수 있다. 팔은 새창조를 의미한다. 영적으로 죽어있던 자가 영적으로 살아난다는 의미를 내포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이아타이 ἰᾶταί)』이아타이(기본형:이아사스타이)는 치유하다, 온전케하다 라는 의미로서, 누가복음 4장 18절에서『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여기에서 넷슬 알란드 성경에는 “상한 마음을 치유하고(ιασασθαι τους συντετριμμενους την καρδιαν)” 라는 말이 빠져 있다. 


예수님이 치유한다는 말은 팔년된 문둥병을 치료하여 낫게 한다는 말 이면에는 성령이 임하여,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하늘의 복음이 무엇인가를 알려주고, 죄에 붙잡혀 있는 자에게 자유를, 영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하는 자에게 하나님 나라를 보게하고, 영적으로 죽어있어서 영의 마음이 파괴되었는데, 회복시켜 준다는 것이다. 


『일어나(아나스테디 ἀνάστηθι) 네 자리를 정돈하라(스트로손)』마태복음 9장 9절에서 사용되었는데,『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일어나다” 라는 말은 물리적으로 앉아있다가 일어난다는 의미보다, 영적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하늘 생명으로 일어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부활(아나스타세이ἀναστάσει))은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서 다시 하늘 생명을 되찾는 의미를 갖는다. 


“정돈하라”는 스트로손(στρῶσον)은 펴다, 깔다 라는 의미가 있다. 마태복음 21장 7-8절에서『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스트로누오)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그리고 누가복음 22장 11-12절에서『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이 네게 하는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먹을 객실이 어디 있느냐 하시더라 하라 그리하면 그가 자리를 마련한(스트로누오)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준비하라 하시니』스트로손은 복음을 받을 준비를 하라는 말이다. 영적으로 죽은 자 가운데 있었는데, 이제 복음을 듣고 영적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라는 것이다.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오니라(에페스트렢산 ἐπέστρεψαν)』에페스트렢산은 복귀하다, 되돌아가다 라는 의미다. 누가복음 1장 16절에서도 같은 단어가 사용되었다.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그들의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라』


병상에 누워있는 애니아와 그를 간병해야 하는 가족들에게 8년이란 세월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룻다에서 애니아를 본 순간, 베드로는 애니아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다. 베드로는 애니아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라고 했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고 했다. 주님이 순간적으로 베드로를 통해서 그렇게 하도록 하여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주님은 애니아의 중풍병을 치료해 주시면서, 그 자리를 정리하라고 말씀하셨다. 애니아의 삶의 자리를 정리한다는 것은 곧 애니아의 육신의 병을 고쳐주시는 것과 동시에 영의 몸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육신의 병고침과 더불어 함께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바로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야 함이다. 육신의 병은 치료되었으나, 영적인 부분이 여전히 중풍병으로 누워있던 때와 동일하다면 육신의 병이 고침받은 것이 진정한 고침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어쩌면 육신의 병보다 더 큰 문제는 영이 살아나는 것이다. 


베드로는 룻다에서 중풍병 환자 애니아를 치유하고 가까운 욥바로 건너갔다. 이때 베드로가 욥바에 간 이유는 죽은 다비다를 다시 살리기 위해서였다. 다비다는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은 여제자였다. 그녀의 죽음을 슬퍼한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다비다가 살아 생전에 만들어 주었던 속옷과 겉옷들을 보여주었다. 


사도행전 9장 40-42절『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프로세웈사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아나스테디) 하니(에이펜)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 들여 그가 살아난 것을 보이니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


프로세웈사토(προσηύξατο)는 문법적으로 중간 디포테이다. 다비다가 죽은 상황에서 주변에서 슬퍼하고 많은 사람들이 모이므로 베드로는 주님께 간청 기도를 한 것이다. 베드로는 심령 속에 임재하시는 호 로고스와 기도를 통해 대화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주의 음성을 듣고 죽은 자를 일으키는 것이다. 프로슈케의 기도를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다 내 보었다. 프로슈케의 기도는 심령 속의 지성소의 기도이기 때문에 주변에 사람들이 있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아나스테디 ἀνάστηθι)하니(에이펜))』아나스테디(ἀνάστηθι), 에이펜(εἶπεν)은 아오리스트 시제다. 순간 성령의 능력으로 말하는 것이다. 아나스테디는 베드로가 문둥병 환자 애니아를 치료할 때 했던 말과 같은 것이다. 영적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하늘 생명으로 일어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베드로는 룻다의 애니아를 고치고, 욥바의 다비다를 살렸다. 룻다의 애니아는 욥바의 다비다와 다른 점이 많았다. 먼저 욥바의 다비다는 여제자로 소개하고 있는데 반해 룻다의 애니아는 그런 소개가 없다. 믿음이 없는 사람일 수 있고 혹 믿음이 있을지라도 열심있는 신앙의 소유자는 아닐 수 있다. 또한 욥바의 다비다는 선행과 구제하는 일에 열심인 사람이었는데 반해 룻다의 애니아는 그런 소개가 없다. 


베드로를 통해 치유의 역사가 나타난 사람들은 그 치유의 근거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었지, 사람의 선행이나 믿음에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룻다의 애니아, 욥바의 다비다를 통해 어떤 결과가 있었는지를 성경은 밝혀주고 있다.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왔다고 말하고,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었다고 전한다. 성경은 주께로 돌아오는 역사, 주를 믿는 이들이 많아지는 역사가 일어난 곳마다 주님이 함께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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