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구약성경 인용)


요한복음 8장 3-5절『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이런 문제를 가지고 온 목적은 정말 여인의 음행 문제에 대한 답을 구하려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대답에서 트집을 잡으려는 저의가 있는 질문이었다. 만일 예수님께서 잡혀온 여인을 긍휼히 여기시면서 그 여인을 놔주도록 말씀하시면 하나님의 아들이라 말하면서 어떻게 율법도 따르지 않느냐고 예수님을 비난할 것이었고, 반면에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율법에 따라 돌로 치라고 하셨다면 당시 로마 제국의 통치 아래에 있던 이스라엘이었기 때문에 어느 민족을 막론하고 사형 선고는 스스로 하지 못하도록 한 로마의 법을 어기게 되어 이 또한 예수님이 공격 당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는 대답이었다.

레위기 20장 10절에는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의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의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라고 되어있다. 표면적으로, 자손을 얻기 위한 신성한 의미를 지니는 성관계를 쾌락을 얻기 위해 이웃의 배우자와 행하는 것은 부정함에 불신앙을 더하는 매우 크나큰 범죄였다. 그러한 부정을 저지른 남녀는 모두 죽을 수밖에 없었다. 이는 가정을 깨뜨리는 것뿐만 아니라 거룩한 공동체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는 가증한 죄였다. 이 조항은 십계명의 일곱번째와 같은 의미를 갖는다.


그런데,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대답없이, 이런 곤란한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엎드려 땅에 무엇인가를 쓰신다. 이들이 계속해서 예수님의 대답을 촉구하자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그들에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다. 유대인 지도자들 눈에 음행하다 잡힌 이 여인은 예수님을 잡아드릴 좋은 미끼가 될만한 사람으로, 죄를 지은 불결한 여인으로 보였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을 하심으로써 사람들의 눈이 그 여인이 아닌 그 일을 행하고 있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그리고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자신을 바라보도록 하셨고, 잠시 후 그 자리에 있던 어른으로부터 시작하여 하나 둘씩 그 자리를 떠났다.


그들은 여인의 죄를 바라보았을 때 율법에서 말하는 것처럼 돌로 여인을 죽여야 한다고 여겼지만 막상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의 죄를 보게 되었을 때 그 누구도 자신의 죄에 대해 감히 자신이 의롭다고 할 수 없었기에 사람들은 그 자리를 떠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예수님이 땅에 쓰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마음에 울리도록 하신 것이다.


구약성경에서 간음한 자들을 쳐죽이는 돌은 율법을 의미한다. 돌은 성전을 건축할 때 사용하는 돌을 의미하며, 예루살렘 성전은 돌로 지어졌다. 그런데, 그 돌은 생명이 없는 돌이다. 율법이라는 돌은 생명을 살리는 돌이 아니라, 정죄하고 죽이는 돌인 것이다. 그러나 율법 속에는 그리스도가 숨겨져 있다. 사람들이 율법 속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면, 버려진 돌이 모퉁이 돌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살리는 돌이 되는 것이다.


베드로전서 2장 6-8절『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톤 로곤)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에테데산) 것이라』


말씀은 톤 로곤(τῷ λόγῳ)이다. 톤 로곤은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에테데산(ἐτέθησαν)은 그들도 정해졌다. 그들은 믿지 않는 자들이다. 미리 예정된 것이 아니라, 믿지 않으면 그렇게 된다는 말씀이다. 믿는 자는 모퉁이 머릿돌이 보배로운 말씀(그리스도)이나, 믿지 않는 자에게는 그냥 하나의 돌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죄인을 정죄하러 세상에 오신 분이 아니라 죄에 빠져있는 인간을 구원하러 오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구원받은 백성들은 죄에 빠지지 말라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죄 지은 죄인이라고 비난하던 음행한 여인에게 예수님께서는 죄의 대가를 묻지 않으시고, 그녀의 죄를 용서해 주셨다. 음행한 여인은 범죄 현장에서 잡힌 사람이다. 하지만『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에 모든 사람들은 그 자리를 떠났다. 그들은 아직 범죄 현장에서 발각되지 않았지만 그들 역시 음행한 여인과 크게 차이 없는 죄인이었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들은 남의 죄를 판단하고 있으나, 모두가 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것이다.


인간들은 완전한 하나님의 사랑을 저버리고 아버지 곁을 떠난 탕자와 같은 것이다. 재산을 달라고 하면 다 주는 아버지를 탕자가 버린 것처럼,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받는 인간들이 하나님을 버린 것이다. 이게 탕자의 모습이고 인간의 타락성을 보여준다. 이 타락성을 깨닫기 전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볼 수는 없게된다. 이 타락성은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탐욕의 죄악성이 기초가 된다. 그래서 죽은 자가 되어서 아버지께 돌아가는 탕자처럼 되는 것이 회개다. 아버지를 떠난 자가 무조건 돌아가면 아버지가 다 받아주실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곤란하다. 하나님은 회개하고 죽은 자가 되어 돌아오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그들의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함이였다. 대부분 신도들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셨으므로, 계명을 지켜야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율법을 통해서 죄를 짓는지 않짓는지 살펴보고 합당한 삶을 살게된다고 생각한다. 그들 생각에 율법이 선한 삶으로 인도하고, 죄를 짓지 않도록 해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잘못된 생각이다.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될 수 있다라는 말은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의롭지 못하다라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완벽하게 율법을 지킬 수 없다. 그래서 율법을 통해서 죄를 짓지 않으려고 하지만, 죄의 그물 망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서 죄를 깨닫게 해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시기 전에도 모든 인간들은 죄에 노출되어 있었다. 그러나 율법이 없었으므로 죄를 알지 못했다 라는 것이다.


로마서 7장 9절『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사람들은 스스로 죄인이라고 인식을 한다. 왜냐하면, 항상 죄를 범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죄의 근본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죄의 근본은 탐욕, 즉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떠난 것이 바로 죄의 근원인 것이다. 죄가 살아나므로, 죄인이 하나님께 대하여 죽은 자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율법을 통해서 죄인이 하나님을 떠난 자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로마서 7장 10절『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많은 사람들은 율법을 통해서 죄를 짓는지 않짓는지 살펴보고 율법대로 잘 지켜서 행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율법이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율법을 잘 지켜서 의로운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가 계속 드러나는 것이다. 인간들이 율법을 바라보는 시각이 이렇게 자기 중심적이다. 하나님이 율법을 통해서 죄를 깨닫게 해주셨는데, 율법을 통해서 의를 이루어보겠다고 자기의 의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율법을 통해서 죄인은 하나님을 떠난 자라는 것을 깨달아야만 한다. 그리고 그 율법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발견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율법이라는 쳐죽이는 돌이 반석이신 살리는 돌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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