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구약성경 인용)
요한복음 10장 34-39절『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율법에 기록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참람하다 하느냐,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 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신대 저희가 다시 예수를 잡고자 하였으나 그 손에서 벗어나 나가시니라.』
예수님도 계속 자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면서, 성경의 구절을 인용하고 말씀하고 있었다.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늘,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신성모독이라 하느냐” 라고 되받았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예수님 주변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정체를 궁금해 했고 때로는 혼란스러워 했다. 예수님을 엘리야, 선지자, 부활한 세례요한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었고 메시아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느날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에워싸고 물었다. 요한복음 10장 24절『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미혹하게 하려 하나이까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하소서』라고 물었다. 예수님은『나는 내 양에게 영생을 주기 위해 왔으며, 아무도 그들에게서 빼앗을 자가 없다고 말을 하고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을 들은 유대인들은 돌을 들어 예수님을 치려했다. 예수님은 자신이 아버지로 말미암아 행한 여러 선한 일들 중에 어떤 일 때문에 돌로 치려고 하는지 물었고,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답했다.
요한복음 10장 33절에서『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로 말미암아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신성모독으로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특별한 일은 아니었지만, 예수님은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칭하셨다. 그러면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셨고, 아버지와 하나라고 했으므로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신성모독으로 들렸던 것이다. 그런데, 이에 대한 예수님의 반박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했는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신성모독이라 하느냐 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은 출애굽기 7장 1절의 말씀이다.『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볼지어다 내가 너를 바로에게 신 같이 되게 하였은즉 네 형 아론은 네 대언자가 되리니』
예수님의 표현에 따르면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면에서, 하나님의 대변인이라는 면에서, 하나님이라 불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권세를 받아서 하나님의 대변인들로서 하나님의 뜻을 이 땅 가운데 펼쳐 보여야 할 책임과 특권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그런 책임을 다할 때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행하시고 말하신다고 할 수 있었다. 하나님은 모세의 손을 통해서 열가지 재앙을 내리시며, 출애굽을 하게 하신 것이다.
창세기 28장 13절의 내용을 보면『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모두의 하나님이라고 하신다. 히브리어 성경을 보면 소유격이 아니라, 동격이다. 아브라함 하나님, 이삭 하나님, 야곱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언약을 체결하므로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시편 82편 6-7절『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그러나 너희는 사람처럼 죽으며 고관의 하나 같이 넘어지리로다.』하나님께서 신들의 모임 가운데 서서 그들을 재판하신다고 증거한다. 신들이라는 표현은 재판장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하나님을 표현하는 엘로힘과 동일한 단어이지만 의미는 전혀 다르다. 하나님은 온 세상을 주관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키지만 본문의 신들, 즉 재판장들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공의에 입각해서 백성들을 심판하는 당시의 통치자들을 의미한다.
고대에는 왕이나 통치자를 대개 신의 대리자로 여겼다. 이들은 자신들의 권력의 기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인식하고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공평으로 판단하며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힘써야만 했다. 그러나 공정한 재판장이 되지 못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재판장들 가운데 서 계시다고 증거한다. 성경에 나타나는 왕이나 재판장의 모습은 일반적으로 앉아 있는 것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출애굽기 18장 13절에서 모세는 앉아서 판결하였다고 증언한다. 그리고 사사기 4장 5절에서 드보라도 이스라엘을 재판할 때 종려나무 아래 앉아서 재판하였다고 증언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서 계시다는 것은 세상의 불의하고 패역한 재판관들을 향하여 심판을 단행하시는 듯한 장면을 표현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일어서 계시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음을 알게 한다. 하나님께서는 악인을 비호하고 약한 자들을 억누르는 이들의 불공평한 재판을 질책하고 계신다. 언제까지 그렇게 하겠느냐고 질책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아주 오래도록 불의한 재판장들을 지켜보고 계셨다는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주목하신 부분은 성경에서 어떤 사람들이 신(하나님)이라고 불렸다는 사실이다. 성경에서 그런 방식으로 신(하나님)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있다면 예수님 자신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을 신성모독이라고 문제 삼아서는 안된다는 것이 예수님의 논리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보낸 자인데, 당연히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수 있지 않는가”라고 말했던 것이다. 예수님은 하는 수없이 “내가 하나님의 일을 행하지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라고 했다. 즉,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안믿어도 좋으니, 그 일, 즉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는 믿으라고 했는데도 유대인들은 들은 채도 않고 예수를 잡고자 했던 것이다.
예수님은 수많은 표적을 행하셨는데, 그것을 보고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로 받아드리지 않았다.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고, 문둥병자를 치료하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여주셨으며, 바다 위를 걸었으며, 귀신을 쫒아내는 등의 신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그런 기적을 보여주셨다. 그러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영적 눈이 감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생각하는 메시야는 로마를 무너뜨릴 강력한 능력을 가진 자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수많은 표적을 보여주신 목적은 자신이 하나님의 권능을 가진 하나님 아들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도 있지만,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기 위함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파괴된 심령에 회복을 주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선언한 것이다. 천국(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은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이다. 예수님은 백성들에게 하나님께로 마음을 돌이키고(회개), 그리스도가 이 땅에 와서 천국을 선포하고 있음을 깨닫기를 바란 것이다. 참 하나님 말씀으로 돌아오기를 바란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무참히 죽여버렸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었지만, 그리스도라는 이름으로 부활하셨으며, 성령세례를 주시고, 제자들의 심령 속에 성전을 세워주신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이 다시 복음의 씨를 뿌리고 오늘날 성도들이 이 일을 계속해 가고 있는 것이다. 복음은 육적 마음을 돌이키고(십자가에서 함께 죽고) 영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세워나가는 것(부활)이다. 이것에 동참하는 자들은 신이라고 칭함을 받는 자들이 되는 것이다.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