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속의 죽음의 의미
대속의 죽음의 의미(구약성경 인용)
요한복음 11장 50절『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은 대속을 의미한다. 다른 말로 속량이다. 속량은 노예를 돈으로 사는 의미를 갖는다. 사람들은 사탄의 노예인데, 하나님이 예수의 피값으로 사는 것이다.
레위기 23장 26-29절『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일곱째 달 열흘날은 속죄일이니 너희는 성회를 열고 스스로 괴롭게 하며 여호와께 화제를 드리고 이 날에는 어떤 일도 하지 말 것은 너희를 위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 속죄할 속죄일이 됨이니라 이 날에 스스로 괴롭게 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이라』
속죄일은『스스로 괴롭게 하라』는 것이다. 나팔절부터 10일간은 고통과 환란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10일간이 끝나면 속죄절이 되고, 속죄절 5일 후에 초막절이 시작된다. 나팔절은 추수가 끝났다는 의미다. 오순절부터 넉달동안 추수가 완전히 끝나서 나팔을 분다는 것이다. 유월절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어린양으로 죽으시고, 초실절에 부활하셨으며,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셨다.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의 역사는 절기를 통해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에 대해서 죽으셨으므로, 절기를 지키는 일은 무의미해졌다.
레위기에 다섯가지의 제사가 나오는데, 레위기 4장 20절에서『그 송아지를 속죄제의 수송아지에게 한 것 같이 할지며 제사장이 그것으로 회중을 위하여 속죄한즉 그들이 사함을 받으리라』다섯가지의 제사에 대해서 설명하고 끝에는 반드시『속죄한즉 그들이 사함을 받으리라』속죄의『속』이라는 말은 영어로 redeem(도로 사는 것)인데, 사도바울은 에베소서 1장 7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에서 『곧』이라는 말은 속량과 죄 사함이 동의어의 개념이 아니라,『이어서』라는 개념이다. 속량이 있어야, 죄사함을 받는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속량은 레위기 4장 20절의『속』을 인용한 것이다. 속량은 대속, 구속이라는 말로도 사용된다. 구입(Purchase)한 후에 해방(delieve)된다는 말이다. 죄를 씻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죄인을 사서 해방되는 것이 먼저다. 이것의 개념이 바로 욤키프러다.
창세기 6장 4절에서『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욤키프러의 명사형이 역청이다.『칠하라(덮으라)』는 말이 카파르다. 구약시대 성소 마당에 놋 제단이 있었다. 어린양에게 안수를 하면서 모든 죄를 전가시킨다. 이것도 redeem이라는 단어다. 그래서 죽은 어린양과 죄인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게 회개하는 자에게 일어나는 속죄가 된다. 그 다음에 물두멍 대야에서 손과 발을 씻어준다. 씻은 다음에 성소 안에 들어갈 수 있었다.
성소 안에는 덮개가 있는데, 이 덮개가 바로 이 단어다. 지성소에는 1년에 한번(음력 7월 10일) 들어가는데, 지성소 안에는 법궤가 있고, 그 위에 속죄소라고도 하고 시은소라고도 하는 덮개(히브리어로 코페르트:은혜로 덮었다는 뜻)가 있다.
모든 죄인들의 죄를 덮는 날이 바로 욤키프러였다. 그래서 1년에 한번 대제사장이 시은소 위에 피를 뿌려, 그 피가 덮어지는 것이다. 신약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주님이 죄인들을 피값으로 사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휘장이 찟어짐) 부활하셔서, 대제사장으로서 보좌에 계시는 하나님께 나아갔으므로, 하나님이 회개하고 돌이키는 자를 사탄으로부터 피값으로 죄인을 사는 것이다.
『속』이라는 말은 덮혀지는 것(카파르)이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부터 덮혀지는 것이다. 그래서 속량이 없는 죄사함은 없다. 하나님이 사는 자는 죄인이 회개하여 돌이키는 자로서, 하나님의 아들을 대신 죽게해서 죄인을 사는 것이다. 놀라운 은혜다. 회개하는 자에게만 자기 아들의 죽음의 값을 지불하는 것이다. 회개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주어진다. 그래서 하나님의 것이 된다.
오늘날 교회에서 속량이라는 말이 사라지고 있다. 욥기 19장 25절에서『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오늘날도 욥처럼 사탄의 시험을 받을 수 있다. 하나님은 사탄에게 욥을 치도록 허락하셨다. 그래서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는 자를 구속해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 주시는 것이다.
여기에서『대속』이라는 말은『가알』이라는 말이다. 룻기에서 룻과 결혼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죽은 남편의 땅을 대신 지불하여 사줄 수 있어야 한다. 사주는 것은 책임을 져주는 것이다. 이게 사랑이고, redeemer라는 단어다. redeemer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세가지가 있다.『코페르, 파다, 가알』이다. 포로나 노예를 대가를 주고 사서 자유롭게 해 준다는 말이다.
히브리 백성이 바로의 압제 아래 있을 때, 하나님이 그들을 해방시켜준 것을 출애굽기 6장 6절에서『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내며 그들의 노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여러 큰 심판들로써 너희를 속량하여』, 신명기 7장 8절에서도『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또는 너희의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속량이 해방이라는 말로 사용되었다. 여기에는 어린양의 죽음이 있다.
속량 곧 죄의 굴레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장사지내는 것이다. 로마서 6장 6-7절에서『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죄인이 죄에 대해서 죽어야만 속량이 적용되는 것이다. 죽는 것은 육적 몸이 죽는 것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을 하셨지만, 예수의 죽음은 곧 죄인의 죽음이라는 것이다. 십자가에 높이 달린 예수님을 기억하며, 그 주검에서 자신을 발견해야만 하는 것이다.
로마서 6장 8-11절에서『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살아있다는 말은 부활생명을 받은 자가 된다. 장차 육체가 죽어서 다시 사는 그런 개념이 아니라, 영적으로 하늘의 생명을 받는 자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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