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사도행전 3장 3절『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제 구 시 기도 시간에』구(9)라는 숫자에 대해서 누가복음 17장 14-19절『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에카달리스데산)을 받은지라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열사람이 깨끗함을 받았는데, 예수께 돌아온 사람은 단 한명이라는 말씀이다. 깨끗함이라 번역된 헬라어 에카달리스데산은 정결의식을 의미한다. 유대인들의 정결의식은 율법에 정해진 대로 희생제물을 죽여서 피를 뿌리는 행위를 하는 것이다. 히브리서 10장 1절『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
하나님은 이 정결의식을 통해서 너희들은 모두 죄인들이라 라고 말씀하시고, 그것을 깨달으면, 돌이켜, 희생양을 대신할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바라보라는 것이다. 이게 믿음이다. 히브리서 11장 1-2절『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바라본 자들은 히브리서에 의하면 극히 일부 였다.
믿음은 회개하여 돌이킨 자에게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다. 돌이키지 않은 자는 자기가 믿는 믿음에 불과하다. 이러한 믿음은 지푸라기 처럼 불에 쉽게 타버린다. 갈라디아서 3장 22-24절『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은 그 돌아온(휘포스트렢산테스) 한 사람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신다. 따라서 구원은 회개하여 그리스도 안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 공동체 신도들은 예수믿고 죄사함을 받으면 구원이라는 말을 한다. 그런데,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자는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못박히고, 예수와 함께 부활하였음을 믿는 자이다.
못걷게된 자는 복음의 진리를 모른다는 말씀이다. 복음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의미한다. 그런데, 베드로가 복음을 전하였지만, 복음을 듣고 회개하여 예수에게로 돌아온 자는 열명 중 한명이라는 말씀이다. 휘포스트렢산테스는 되돌리다, 돌이키다 라는 의미를 갖는다.
죄인이 죄 사함을 받았는데, 예수에게로 돌이키지 않고(회개하지 않고), 계속 자기의 일로 나갔다는 것이다. 결국 구원에서 멀어진 것이다. 회개하여 예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어야 하는 것이다. 로마서 6장 6-7절『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태어나면서부터 사람들은 죄인들이 되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집이라는 성전 미문에 사람들이 그를 메고 온다고 표현했는데, 오늘날 성도들이 예수를 모르는 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성전에 들어가는 자는 표면적으로는 성전 안에 기도하러 들어가는 것이다. 성전에는 여인의 뜰이 있었는데, 이스라엘 사람이면 남녀의 구분없이 모두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다. 아침과 저녁에 드리는 정기적인 번제 때에 성소에서 분향하는 시간이 있는데 이때 성전에 기도하러 온 사람들은 여인의 뜰에서 기도를 했다. 그래서 여인의 뜰은 기도의 뜰이라고도 불리었다.
그런데, 못걷게 된 자는 자력으로 성전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었지만, 이들은 성전의 미문에 있는 것은 기도가 아니라, 성전에 들어가는 자자에게부터 무엇인가를 얻기 위함이었다. 표면적으로는 돈일 것이다. 그러나 이면적으로는 성전을 통하여 이득을 얻으려고 하는 기복신앙을 의미한다. 오늘날 교회 공동체에서 기복신앙이 만연하고 있는데, 이는 마치 걷지 못하는 자가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는 자와 같다는 것이다.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미문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호라이안인데, 아름답다(beautiful) 라는 의미다. 다시 번역하면, 『아름답다고 불리는 성의 문에 두는 자라』라고 해야한다. 문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성전이 아름다운 것이다. 성전은 기도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므로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나 문은 성전 안으로 들어가는 곳인데, 문에 걷지 못하는 자를 두었으므로, 성전에 들어가지 않은 자인 것이다. 성전에 들어가지 못하므로 그는 구원받은 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늘날 신도들이 교회 공동체에 모여 예배를 드린다고 하지만, 심령 속의 성전도 모르고 예배를 드리므로, 하나님이 받는 예배가 아닌 것이다. 그들은 성전의 문 앞에 있는 자와 같은 것이다.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하나님을 떠나 죄인이 된 자들 중에서 복음을 알기 위해 교회 공동체로 들어오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참 복음을 듣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참 복음을 듣지 못하면, 마치 성전의 문에서 구걸하는 모양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참 복음을 전하는 베드로와 요한을 만난 것이다. 참 복음은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의미하며,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되는 자가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이것을 믿는 믿음이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된다.
그들이 이런 참 복음을 들었지만, 실제 그 복음을 듣고 회개하여,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온 자는 많지 않다는 말이다. 열명 중 한명으로 표현되었다. 열(10)이라는 숫자는 모든 죄인된 사람이라는 말이고, 한(1)이라는 숫자는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자를 의미한다. 죄인들이 복음을 듣지만, 그 중에서 극히 소수만 복음으로 인해서 하나님께 돌이켜, 예수와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하여 하늘에 앉히신바 되는 자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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