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사도행전 14장 1절『이에(Ἐγένετο:에게네토)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에이셀데인εἰσελθεῖν) 말하니(랄레사이λαλῆσαι)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한글 개역개정의 번역이 정확하지 않다. 헬라어(그리스)로 다시 보면,
Ἐγένετο δὲ ἐν Ἰκονίῳ κατὰ τὸ αὐτὸ εἰσελθεῖν αὐτοὺς εἰς τὴν συναγωγὴν τῶν Ἰουδαίων καὶ λαλῆσαι οὕτως ὥστε πιστεῦσαι Ἰουδαίων τε καὶ Ἑλλήνων πολὺ πλῆθος.
에게네토는 ~되다, 일어나다, 행하다, 이루어지다 등의 의미로 사용된다. “에게네토 데 엔 이고니온”(Ἐγένετο δὲ ἐν Ἰκονίῳ)은 이고니온 안에서 이루어졌다 는 것이다. 무엇이 이루어졌는가는 그 다음 문장에서 카타 투 아우토(κατὰ τὸ αὐτὸ)인데, “그와 같이 이루어진 것을 따라” 이다.
“그와 같이 이루어진 것을 따라”는 사도행전 13장 49-52절에서 찾을 수 있다.『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에우스케모나스)과 그 시내 유력자들(프로토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게 하여 그 지역에서 쫓아내니 두 사람이 그들을 향하여 발의 티끌을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거늘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바울과 바나바는 더 이상 비시디아 안디옥에 머물 수 없었다. 유대인들의 박해가 더욱 거세졌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시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했다고 한다. 에우스케모나스는 귀족의 지위에 있는 자를 의미하고, 프로토스는 첫째의 서열에 있는 자들이다. 유대인들이 종교심이 있는 귀족 여인들과 정치 지도자들을 선동하여 그 도시로부터 나가게 한 것이다. 그런데, 바울과 바나바가 전하는 복음을 들은 사람들은 제자들이 되어 오히려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게 되었다고 한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일어난 것과 같이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말을 할 때, 유대와 헬라(그리스)의 허다한 무리가 믿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회당에서 전도하므로, 유대인들의 극렬한 반대에 부딪혔을 것이다.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도시의 지도자 급에 있는 자들은 바울과 바나바가 전하는 복음을 믿지 많았지만, 유대와 헬라의 일반 서민들은 믿었다는 말씀이다. 지도자 급에 있는 자들은 세상이 주는 기쁨이 있기 때문에 복음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다.
요한일서 2장 15-16절『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그런데, 복음을 듣고 예수님의 제자가 된 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했다고 한다. 기쁨은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은혜이다. 회개하여 돌이키므로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바로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된다는 그 기쁨이 되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선민사상에 사로 잡혀 있었지만, 복음을 전해듣고, 자신들이 알고 있던 율법에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메시야로서 구원자로서 세상에 오신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성령이 충만했다는 말은 헬라어로 “에플레룬토 프뉴마 하기우”로서 성령이 가득찼다는 것이다. 에플레룬토는 가득차다 등의 의미다. 교회 공동체 사람들은 성령에 대해서 잘 모른다. 성령이 가득차다, 충만하다 라는 의미를 성령 하나님이 주시는 친밀함으로 풀이한다. 이는 삼위일체를 근거로 성부하나님, 성자하나님, 성령하나님이라는 삼위의 하나님인데, 그 중에 성령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잘못된 교리이다.
유일신이신 하나님은 한 분으로서, 오직 성부 하나님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기 전에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단지 부활하신 예수님은 세상 종말이 있기 전까지 하나님 본체이시면서, 성부 하나님 우편에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성령은 생명의 빛이며, 죽었던 영을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성령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왔으므로, 성령은 성부의 일체이시나, 성령을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유일신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다. 정확하게는 하나님의 영이라고 해야만 할 것이다. 구약성경에서는 대부분 하나님의 영이라고 표현된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태어나셨다. 하나님이 마리아에게 성령의 빛을 주시고, 그 생명의 빛이 하나님의 능력이 되어 마리아가 잉태를 하게 된다. 그래서 태어난 자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가 삼십살쯤 되어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을 때, 마태복음 3장 16-17절에서 말한다.『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을 비둘기처럼 묘사했으나, 비둘기의 히브리어는 요나이다. 요나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의미하는 선지자 역할을 했는데, 예수님이 그 역할을 하기 위함이라는 메시지로 볼 수 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권능이 임할 때 여러가지 방법으로 표현된다. 시내산에서 불로, 빽빽한 구름으로, 번개와 천둥으로,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다. 그런데, 그 생명의 빛이신 성령이 예수를 광야로 이끈다. 마태복음 4장 1절『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왜 빛이신 하나님의 영이 예수를 사탄의 시험을 받게하는가? 그 이유는 당시 예수는 마리아의 아들인 사람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험을 통과한 후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로 확증되는 것이다. 따라서 십자가에서 죽어야 할 예수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그 분은 하나님으로부터 죄사함과 심판의 권능을 받았지만, 하나님은 아닌 것이다.
하나님이 성령의 빛을 예수에게 보내주셨으나, 성령은 사탄의 시험을 받게 하므로, 이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공생애의 사역을 시작하는 것이다. 성령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하는 하나님의 영이시다. 성령이 임했지만, 성령이 그 사람의 위에 임하는 것이다. 예수님에게 임하신 성령도 자기 위에 임한 것이다.
성부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성령의 빛을 보내주시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세례로 부활생명의 빛을 보내주신다. 요한복음 20장 21-22절"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성령이 임했으나, 성령이 떠나가기도 한다. 사무엘상 11장 6절에서『하나님이 사울을 왕으로 세우려고 하는데, 백성들이 탐탐하게 여기지 않자, 하나님이 사울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게 하셨다. 사울이 이 말을 들을 때에 하나님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매 그의 노가 크게 일어나』그러나 사울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으므로 하나님의 영이 떠나가는 것을 본다. 사무엘상 16장 14절『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그를 번뇌하게 한지라』
성령 충만을 받는 자는 오직 십자가의 예수와 연합되고, 부활하신 예수와 연합된 자만 받는다. 이들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고 하는데, 하나님으로부터 그리스도에게로,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빛을 성도에게 주셔서 성령충만해지는 것이다. 이를 부활생명이라고 할 수 있다. 성령의 빛은 부활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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