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을 따르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따르는 자도 있는지라
유대인을 따르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따르는 자도 있는지라
사도행전 14장 2-7절『그러나 순종하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에카코산)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에피 토 퀴리오) 담대히 말하니(팔레시아조메노이)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에피 토 로곤)을 증언하시니(마르투룬티) 그 시내의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따르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따르는 자도 있는지라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리들이 두 사도를 모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 그들이 알고(쉬니돈테스) 도망하여(카테퓌곤)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그 근방으로 가서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
에피 토 퀴리오(ἐπὶ τῷ κυρίῳ)는 주님 위에서라는 것이다. 팔레시아조메노이(παρρησιαζόμενοι)는 파라(많은)와 시아메노이(말하다)의 합성어로 호 로고스로 많은 말을 했다는 것이다. 즉 주님 위에서 많은 말을 했다는 것이다. 에피 토 로곤(ἐπὶ τῷ λόγῳ)은 은혜의 말씀(호 로고스) 위에서 라는 것이다. 마르튀룬티는 증언하다라는 의미다. 즉 호 로고스 위에서 표적과 기사를 통해서 증언을 한 것이다. 쉬니돈테스와 카테퓌곤이라는 동사도 아오리스트 시제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모양이다.
어떤 사람은 유대인을 따르고, 어떤 사람은 두 사도를 따랐다고 한다. 어떤 마음이 믿음의 방향을 결정하게 하는가? 처음에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악 감정을 가지게 했다. 엑카코산은 악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마음은 어떤 말을 듣는 순간, 그 말에 동화되고 영향을 받는다. 그런데, 이방인들이 두 사도가 보여주는 표적과 기사를 보고, 은혜의 말씀을 듣는 순간 앞에서 앞의 동화된 마음이 바뀌는 것이다. 이방인 모두의 마음이 바뀐 것이 아니라, 일부가 바뀐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유대인을 따르고, 어떤 사람은 두 사도를 따르게 된 것이다.
마음이 바뀌지 않은 자들은 율법주의의 지배 아래 있는 자들이다. 그들은 오직 율법 만이 구원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 자들이다. 율법주의자들은 엄밀히 말하면, 자기가 주체가 되어 율법을 이룰 수 있다는 전제 하에서 율법주의를 내세우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바뀐 자들은 율법으로는 완전하게 의를 이룰 수 없음을 깨닫는 자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복음을 받아드리게 된다. 표적과 기사를 보게되므로 더욱 신뢰가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은혜의 말씀, 즉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된다는 사도들의 말에 마음의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마음의 변화는 자신의 믿음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하늘로부터 오는 믿음을 주시는 것이다. 이게 그리스도의 믿음이다. 하늘로부터 오는 믿음이 그리스도이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쳐진 장벽을 무너뜨리는 힘이 되는 것이다.
두 사도, 바울과 바나바는 그동안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만나게되고, 율법주의에서 벗어나게 되었는지 간증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왜 나사렛 예수를 메시야로 세웠는지 설명했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탕자의 비유에서 처럼 하나님을 떠난 존재들인데,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율법을 통해서 그들이 죄로 부터 벗어날 수 없는 존재들이라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함이며, 나아가 모든 세상 사람들이 다 죄인들이라는 것을 이스라엘을 통해서 깨닫게 해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깨닫는 자도 없고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도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정하시어 십자가에서 공의의 심판을 진행하셨다.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죽어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을 믿는 자는 죄로부터 자유함을 주시는 것이다. 이는 율법 속에서 희생 동물의 제사를 통해서 이미 알려주신 바 있는데, 깨닫는 자가 있는 반면, 깨닫지 못하는 자가 있다는 말씀이다.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리들이 두 사도를 모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두 사도의 말을 믿지 않은 이방인들과 율법주의에 빠진 유대인들, 그리고 그 지역의 관리들이 합세하여 두 사도를 돌로 치려했다. 그들의 눈에는 이단으로 보이는 것이다.
오늘날 교리에 젖어있는 신도들에게 그리스도의 진리의 말씀을 전하면 곧바로 이단으로 몰아, 눈총으로 돌로 치는 것처럼 쳐다볼 것이다. 그 이유는 잘못된 교리가 마치 율법주의를 신봉하는 것과 같은 종교심이 되는 것이다.
성경은 성령에 감동되어 하나님이 사람의 손을 통해서 작성된 말씀이다. 그런데, 그 성경의 말씀을 읽을 때, 성령의 감동으로 읽어야 하는데, 교리로 해석하고 읽도록 하므로 결국 율법주의와 다를 바가 없게 되는 것이다. 성경 귀절은 어떤 사람에게는 이렇게 적용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저렇게 적용되기도 한다. 그 이유는 사람이 처한 상황에 따라서 성령이 인도하는 바가 다르게 적용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리는 인간이 성경해석을 법 규정처럼 정해버리기 때문에 모순이 생기는 것이다. 그것이 잣대가 되어서 교리를 벗어난 다른 말을 하면 이단으로 정죄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죄에 대해서 교리를 적용하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것을 죄로 여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죄는 하나님을 떠나는 탐욕이 죄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성경을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을 떠난 상태를 죄로 깨달을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성경을 통해서 탐심을 가진 것을 죄로 깨달을 수 있으며, 어떤 사람은 에덴동산을 통해서 죄의 속성을 깨달을 수 있으며, 어떤 사람은 범죄한 천사를 통해서 죄의 기원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죄는 율법을 통해서 규정화 할 수 없는 복잡한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이다.
그런데, 교리는 죄에 대해서 규정화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십계명을 바라보는 교리는 계명을 어기는 것이 죄라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십계명을 통해서 자신의 마음을 돌이켜 보라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십계명을 주신 의미를 통해서 자신의 죄악된 마음의 상태를 깨닫고, 그 의미를 마음에 간직하고 살면서 하나님의 마음으로 적용시켜라는 것이다.
성경에서 살인하지 말라고 했으므로, 이 말씀을 교리로 적용하면, 전쟁이 발발하여 적이 쳐들어와도 그냥 있으라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구약성경에 보면 이스라엘이 적과 싸워이긴 사례가 얼마든지 많다. 하나님이 마음에 가장 적합하다는 다윗만 보더라도 얼마나 많은 전쟁에서 적을 공격했는가
기독교의 가장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삼위일체에 대해서, 삼위일체라는 말은 하나님을 정의할 때 사용된 단어이지만, 성경은 성부와 예수 그리스도, 성도가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을 말하고 있다. 삼위일체라는 말은 유일신을 오해하게 만드는 것이다. 한 하나님이라고 말을 하면서, 하나님이 세분인 것처럼 오해하게 만든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성령은 하나님의 영으로서 그 속성은 하나님과 하나이지만, 그 자체가 하나님은 아닌 것이다.
신도들이 성부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서, 이것은 교리의 산물이라고 말을 할 수 있다. 교리에 젖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는 것을 이단이라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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