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
사도행전 19장 11-12절『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크로토스)에서 손수건(소우다리아)이나 앞치마(시미킨디아)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프뉴마타 포네라)도 나가더라』
크로토스는 영어로는 skin(피부)이다. 손수건이나 앞치마는 바울의 몸에 걸치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의 목이나 허리춤에 걸치고 있는 손수건이나 앞치마 같은 것을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앉으니 병이 떠나 갔다고 한다. 손수건이나 앞치마가 능력을 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다.
예수님이 중풍병자를 치유하신 일이 있다. 중풍병자는 스스로 움직일 수 없어서, 다른 사람이 도와주지 않으면 움직일 수 없는 그런 상태의 환자이다. 중풍환자의 영적인 의미도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낫게하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는 자를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낫게하신다는 말은 병을 치유하는 것 외에 죄를 사해주는 의미를 갖는다. 마가복음 2장 9-11절에서『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대 곧 일어나니(ἀνάστηθι καὶ στρῶσον σεαυτῷ)』 일어나다 라는 헬라어 아나스테디(ἀνάστηθι)는 물리적으로 일어나다라는 의미보다, 영적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 또는 일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프뉴마타 포네라)도 나가더라』여기에서 악귀라고 번역된 프뉴마타 포네라는 죄인을 관리하는 영으로서, 악역을 담당하는 천사를 의미한다. 마귀나 귀신이라고 불리는 영을 의미하는데, 율법 아래 있는 자를 관리하는 영이다. 병든 사람은 영적으로 율법에 갇혀있는 자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이 복음을 전하므로, 그 복음의 말씀을 받아드리므로, 죄가 사해지고, 율법으로부터 자유인이 죄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중풍병자는 단지 몸을 움직일 수 없는 몸을 치유받기 위함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표면적으로는 중풍병을 고치는 목적이지만 오랜기간 들어왔던 메시야를 만나는 것이 더 큰 목적이었던 것이다. 중풍병자는 율법 속에서 메시야를 발견하고, 드디어 현장에서 메시야를 중풍병을 이유로 만나게 된 것이다.
오늘날 복음을 받는다고 하는 신자들이 여전히 율법의 자리에서 떠나지 않는다면 자리를 정돈하지 않는 것이다. 율법의 자리에서 떠나지 않는 가장 큰 잘못은 죄에 대한 잘못된 생각들이다. 성경은 병자를 통해서 진리를 알려주는데, 잘못된 생각을 하는 자들은 여전히 율법 속에 머물고자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 바울의 손은 하나님의 손을 의미한다. 바울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구약에서 모세를 통하여 이적을 보이신 것도 모세의 손을 통해서 하나님이 역사하신다. 예수님이 온갖 기적을 행하시는 것도 하나님이 예수를 통하여 이적을 일으키는 것이다. 하나님이 성도의 손을 통하여 이적을 일으키는 사례는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이 모든 사례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나타내게 하려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바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복음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생명이다. 회개하는 죄인이 예수를 통하여 십자가에서 죽고,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를 통해서 부활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하심이다.
병을 치유받았다는 것은 죄를 용서받은 것이고, 부활생명을 얻는 것과 같은 것이다. 부활생명은 성령의 빛이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으로서, 믿고 세례받는 자에게 영원한 생명이 되어 주시는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이나 성령을 마치 살아있는 사람의 모양으로 생각하는 자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성령은 영이다. 영은 생명의 빛이시나, 물질세계에서는 영의 몸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성도 역시 영의 몸을 입고 있다. 그러나 육체가 있으므로 보이지 않을 뿐이다.
마태복음 5장 14-15절『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산 위의 동네는 오늘날 교회 공동체를 의미한다. 교회의 성도가 부활생명을 받아서 임마누엘이 되면 교회 공동체 안에 빛이 되는 것이다. 부활생명인 빛이 그 안에서 발산되는 것이다. 교회 공동체 안에 생명의 빛이 되는 자가 있고, 빛이 되지 않은 자가 구별되는 것이다. 그래서 빛이 아닌 자가 그 빛을 보고, 부활생명의 의미를 깨닫고 모두가 생명의 빛이 되는 원리가 된다.
빛은 집안에서 먼저 비춰지고 그 다음에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교회 공동체에서 임마누엘이 되는 사람은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춰진다. 교회 공동체가 흑암에 싸여 있는 자들이 있다는 말이다. 빛이 온 세상을 비추기 이전에 집안을 먼저 비추는 자가 되고 그 다음에 온 세상에 빛이 발산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간 자는 빛을 비출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 전에는 흑암에 있었으므로 빛을 비출 수 없었다.
예수님이『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 빛이 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빛이라고 선언하셨다. 우리는 스스로 빛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신도들은 스스로 부활생명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성령의 빛을 받아야만 부활생명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빛이 됩시다.』 또는『빛이 되게 해주시고』라고 기도한다. 우리는 스스로 빛이 될 수 없는데, 『빛이 되자』라고 말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빛이 되었는데, 빛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말하자면 하늘로부터 태어나지 않은 자들의 기도인 것이다. 성령의 빛을 받아 부활생명인 새생명으로 태어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이미 부활생명인 빛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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