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사도행전 19장 20절『이와 같이 주의 말씀(투 퀴리우 호 로고스)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Οὕτως κατὰ κράτος τοῦ κυρίου ὁ λόγος ηὔξανεν καὶ ἴσχυεν

헬라어를 다시 번역하면, 이리하여(우토스 Οὕτως) 여호와의 권능으로(카타 크라토스 투 퀴리우 κατὰ κράτος τοῦ κυρίου), 말씀(호 로고스 ὁ λόγος)이 확산하고(에욱사넨 ηὔξανεν) 그리고(카이 καὶ) 힘을 갖게 되었다(이스퀴엔 ἴσχυεν).


이와 같은 일은 유대인들이 바울이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쫒아내는 흉내를 내다가 악령으로부터 공격을 받은 것이다. 그래서 그 광경을 본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높이고, 마술을 행하던 자들이 와서 책을 불태운 그 사건을 의미한다.


퀴리우는 기본형이 퀴리어스로서 히브리어 아도나이와 같은 단어이다. 아도나이는 하나님의 정체성으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할 때, 하야 아세르 하야의 말로서 유대인들이 아도나이라고 부르고, 이후 야훼로도 부른 것이다.


여호와의 권능은 말씀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호 로고스이신 것이다. 호 로고스는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즉 여호와의 권능은 그리스도인 것이다. 말씀이 확산되고 힘을 갖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힘을 갖고 확산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인 것이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빠진 말은 복음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호 로고스가 아니라, 사람들의 말이 되며, 여호와의 권능이 역사하지 않는다. 오늘날 기독교의 문제는 인간들이 만들어낸 교리에 있다. 사람들이 만든 교리를 적용시키면, 호 로고스가 아니라 사람들의 말이 되는 것이다.


교리를 만든 사람들은 기독교를 설명하고, 타 종교와 구별되기 위해 교리를 만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성경의 내용을 해석하고 분석하는데, 큰 줄기를 만들었을 뿐, 세세하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말씀은 표현되지 않은 부분이 많이 있다. 그러므로 성경의 해석을 교리에 입각해서 번역하는 일들이 벌어지는 것이며, 교리에 규정되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는 성경학자들은 해석하지 못하고, 신도들 마다 다르게 적용하기도 하는 것이다.


대요리문답 78. 왜 신자의 거룩하게 됨이 완성될 수 없는 것인가? 답. 신자의 거룩하게 됨이 완성될 수 없음은 그들의 모든 부분에 죄의 잔재가 묵고 있기 때문이며, 영을 거슬러 싸우는 끊임없는 육의 정욕 때문이다. 이로서 신자들은 흔히 시험에 들어 여러가지 죄에 빠지게 되어 그들의 모든 신령한 봉사에서 방해를 받는다. 그래서 그들의 최선을 다해 한 일이라도 하나님의 목전에는 불완전하고 더러운 것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다. 십자가의 죽음은 죄에 대해서 죄의 몸이 죽고, 그 죄의 몸이 죽으므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와 연합된 자가 죄에서 벗어난다고 말을 한다. 로마서 6장 6-7절『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늘의 생명을 의미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합되는 자도 역시 하늘의 생명을 얻는 자가 된다. 즉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성도가 성령으로 하나가 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하나가 되므로, 성도가 거룩하다는 칭호를 얻게 되는 것이다.


베드로전서 1장 16절에서『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거룩하게 되기 위해 노력하는 자들은 거룩의 의미를 모르는 자들이다.


베드로전서 1장 15절에서『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겐네데테:기본형은 기노마이)』개역개정의 내용을 보면 마치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자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헬라어 성경을 다시 번역하면, (ἀλλὰ κατὰ τὸν καλέσαντα ὑμᾶς ἅγιον καὶ αὐτοὶ ἅγιοι ἐν πάσῃ ἀναστροφῇ γενήθητε) γενήθητε는 γίγνομαι(기노마이: 태어나다, 생산되다 라는 의미)에서 유래된 것이다.


요한복음 3장 5절에서『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겐나오)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겐나오(거듭나다) 라는 말은 게노스(세대, 혈통)에서 변형 유래되었으며, 게노스 라는 단어는 기노마이(기본형은 겐네데)에서 유래되었다.


베드로전서 1장 15절을 다시 번역하면,『그러나 너희를 부르신 이가 거룩한 것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로 태어나라』모든 행실에서 죽고 다시 태어나라는 말이다. 거룩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될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거룩으로 태어나는 자는 부활생명을 받은 자이다.


그러나, 성도의 심령 속에는 부활생명을 가진 새사람이 있지만, 옛사람도 공존한다는 사실이다. 이게 영적 전쟁인 것이다. 거룩한 자인 새사람은 하늘로부터 태어났고, 옛사람은 부모로부터 태어났다. 옛사람이 죽었다는 말은 정체성은 변화를 의미한다. 성도 자신의 정체성은 하늘로부터 태어난 영에 있다는 것이다.


로마서 8장 4-7절『육신(사르카)을 따르지 않고 그 영(프뉴마)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사르카를 영어 번역에서는 fresh로 했는데, 육신이라는 말은 육체(body)를 연상하므로, 육정이라고 표현하는게 좋을 것이다. 프뉴마는 성령을 의미한다. 성도가 하늘로부터 난 자라는 것은 성령을 따르는 자라는 것이다.


대요리문답에서 말하는 “왜 신자의 거룩하게 됨이 완성될 수 없는 것인가? 신자의 거룩하게 됨이 완성될 수 없음은 그들의 모든 부분에 죄의 잔재가 묵고 있기 때문이며, 영을 거슬러 싸우는 끊임없는 육의 정욕 때문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 작성한 신학자는 인간의 정체성을 영과 육의 혼합체로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여기에 혼이라는 용어를 등장시켜 영과 혼과 육을 구원받는 인간의 정체성으로 규정한다. 육의 정욕에서 육은 육체(body)를 의미하고, 육체의 정욕은 헬라어 사르카(육정)를 의미한다.

이 성경학자는 구원받는 정체성을 프뉴마와 사르카를 동시에 갖는 존재로 생각하므로, 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으로 여긴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죄가 있을지라도, 정체성이 성령으로 바뀌었으므로, 성령의 법에 적용을 받는 것이지, 육의 법인 율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 라고 말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로마서 8장 1-2절에서 말한다.『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나는 날마다 죽노라의 바울의 고백을 기억해야만 한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혼과 영과 골수를 쪼개기까지 하며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