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메드리오라 하는 어떤 은장색의 선동

 데메드리오라 하는 어떤 은장색의 선동


사도행전 19장 23-26절『그 때쯤 되어 이 도로 말미암아 적지 않은 소동이 있었으니 즉 데메드리오라 하는 어떤 은장색이 은으로 아데미의 신상 모형을 만들어 직공들에게 적지 않은 벌이를 하게 하더니 그 직공들과 그러한 영업하는 자들을 모아 이르되 여러분도 알거니와 우리의 풍족한 생활이 이 생업에 있는데 이 바울이 에베소뿐 아니라 거의 전 아시아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을 권유하여 말하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 하니 이는 그대들도 보고 들은 것이라』


바울은 실제 엄청난 권능의 모습을 그들에게 보여주면서, 손으로 만든 것은 신이 아니라고 말하고 사람들에게 호 로고스를 전해주었다. 그런데, 에베소에서 바울로 인해 큰 소동이 일어난 것이다. 이유는 바로 바울이 전한 복음으로 인해 생계에 위협을 가져오게 된 자들이 소동을 일으킨 것이다.


은으로 아데미 신상 모형을 만들어 팔던 은 세공 기술자들 중 데메드리오가 나서서 자신들의 생업과 풍족한 생활이 위협을 받게 되었을 뿐 아니라, 신앙과 도시들이 무시를 당했다고 사람들을 선동한 것이다. 그러자 에베소 온 시내 사람들이 바울과 같이 다니던 두 사람을 붙잡아 연극 공연장으로 몰려든 것이다.


아데미는 당시 소아시아 모든 여신의 어머니 신으로 풍요와 다산의 에베소의 수호신이었다. 그러자 그 소식을 들은 바울이 연극장 안으로 들어가려 했고, 바울의 제자들과 친구들이 바울을 말린 것이다. 그리고 연극장에 모인 수만의 인파들은 자기들이 왜 그곳에 모였는지 그 이유를 모른 것이다.


그들은 자극적인 선동에 휩쓸려 이유도 모르고 뜻도 모른 채 몰려온 것이다. 알렉산더는 유대인 중에서 기독교인이었다. 그래서 언변도 좋고 하므로 나사서 말하도록 권유를 받았는데, 그들이 알렉산더를 보고 유대인이라고 더 소리치며 소란을 떨었다. 그리고 연극장에서 무리들은 두 시간이나 소리를 질렀고 가까스로 서기장의 설득으로 흩어졌다.


곧 데메드리오 한 사람의 선동에 의해 촉발된 소요가 서기장 한 사람에 의해 진정된 것이다. 하나님이 복음을 전할 수 있게, 서기장을 앞세워서 소요를 진정시켰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서기장은 불법집회를 용납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그들을 흩어지게 했는데, 고소 고발할 것이 있으면 절차를 밟아서 하라는 것이다. 경솔하게 행동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상에게 절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우상을 만들어 파는 것도 우상숭배의 한 부류가 될 것이다. 우상이 무엇인가? 우매한 형상을 신이라고 사람들이 그것에 목숨을 의지하고 복을 비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에게는 종교심이 있다. 그래서 무엇인가에 의지하고 싶은 것이다.


사도행전 17장 22-23절『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종교심이라고 번역된 헬라어“데이시다이모네스테로우스”는 미신적인 것을 의미한다. 미신에 대한 마음은 형상 뿐만 아니라, 문화나 풍습, 전통에 까지도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그 미신이 자신을 지켜줄 것과 복을 가져다 줄 것을 믿는 마음이다. 그런 마음은 두려움과 무엇인가에 의지하고 싶은 위안감에서 비롯된다.


두려움과 위안감은 자신이 세상에서 보잘것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데서 시작한다. 그래서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은 위험 속으로 들어갈 때, 미신으로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굿을 하고, 제사를 지내고, 어떤 곳에 특정 물건을 두고, 특정 물건이나 글자를 몸에 지니고, 어떤 날을 중요시하거나 풀이하고, 점을 보고 하는 행위들이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보이는 형상으로 마음을 빼앗기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생각하고 느끼고 깨달아야 하는데, 사람들은 예수를 사람의 아들로 바라보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 길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어쩌다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깨닫고 믿게 되었다고 할지라도 이런 신상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이다. 신상을 통해서 하나님을 의지하고자 하는 것이다.


사도행전 19장 29-31절『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사도바울이 말하는 바는 반드시 모든 사람에게 심판의 날이 다가온다는 사실이며, 부활이 있다는 사실이다. 심판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상징되며, 부활은 영원한 생명으로 상징된다. 오직 하나님의 형상인 예수 그리스도 만이 심판을 대신하고 영생을 가져다 주시는 분이다.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자만 하나님으로부터 심판받았으며, 부활생명인 영생을 가진 자가 되는 것이다. 이게 진리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진리를 왜곡하게 하고, 보지 못하게 한다. 오늘날 교회 공동체 안에서 상징적인 십자가는 우상이 되어 가고 있다. 신도는 십자가를 통해서 부활 생명을 생각해야 하는데, 십자가를 통해서 죄만 생각하는 것이다. 성도가 십자가를 바라보는 마음은 내가 하나님께 심판받은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고,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역시 부활생명을 누리는 자가 되었음을 감사하는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자신의 죄를 바라보는 자는 여전히 죄 가운데, 율법가운데 사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십자가가 그들에게는 우상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도들은 여전히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죄를 기억하고, 죄를 용서받기 위해 십자가를 부여잡고 하나님께 빌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회 공동체 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잡는 자는 극히 드물다. 대부분 보이는 십자가를 부여 잡는다. 찬송가에도 수없이 많은 내용들이 이와 같이 등장하므로 신도들은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골로새서 1장 13-15절『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보이는 십자가를 부여잡지 말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 잡아야 한다. 그래서 신도는 예수와 함께 죽었고, 부활하신 예수와 함께 영생을 가진 자라고 믿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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