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과 다른 죄수 몇 사람을 아구스도대의 백부장 율리오란 사람에게 맡기니
바울과 다른 죄수 몇 사람을 아구스도대의 백부장 율리오란 사람에게 맡기니
사도행전 27장 1-2절『우리가 배를 타고 이달리야에 가기로 작정되매 바울과 다른 죄수 몇 사람을 아구스도대의 백부장 율리오란 사람에게 맡기니 아시아 해변 각처로 가려 하는 아드라뭇데노 배에 우리가 올라 항해할새 마게도냐의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도 함께 하니라』
사도 바울과 누가는 배편으로 로마로 향하게 되며, 백부장 율리오가 그들과 다른 죄수들의 호송 책임을 맡게 되었다. 바울은 죄수는 아니지만 미결수 상태였으므로 죄수 취급을 받은 것이다. 아마도 의사였던 누가가 노쇠하고 병약한 바울의 곁에 필요했기에 누가가 동행했을 것이다. 이 길고 어려운 항해의 길에 두 사람 외에도 마게도냐의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도 함께 하게 되었다. 로마로 가는 길은 배를 여러 번 갈아타야 하는 여정이었기 때문이다.
바울 일행은 배를 타고 가다가 루기아의 무라 시에서 이달리아로 가는 배를 갈아탔다. 바다 바람 때문에 어렵게 항해를 하다가 라새아 시와 가까운 미항이라는 곳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바울에게 예언을 주게 된다. 하나님이 주시는 예언은 반드시 이루어질 일들로서, 그 예언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리고자 하는 목적이 있는 것이다.
사도행전 27장 9-11절『여러 날이 걸려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항해하기가 위태한지라 바울이 그들을 권하여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항해가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를 끼치리라 하되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당시 9월이나 10월에 있는 금식하는 절기라고 표기된, 유대인의 속죄일이 이미 지나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에 바울이 백부장 율리오에게 권했다. 이미 여러 번의 파선 경험을 가진 바울은 당시 금식하는 절기가 지나 겨울이 다가오면 바람과 파도가 거세어 지고, 항해 가운데 큰 폭풍을 만날 수 있는 것을 알았기에 무리한 항해의 위태함을 알아 백부장에게 권한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백부장은 바울의 권고보다는 선장과 선주의 말에 더 귀를 기울였다.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었다. 바울이 머물렀다가 겨울이 지나면 가는 것이 좋겠다고 권고한 항구는 겨울을 지내기에 비교적 작은 항구라 불편했고, 뵈닉스라는 그레데의 항구에 가서 겨울을 지내자고 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기 때문에 백부장은 바울의 말을 귀담아 듣기보다 선장과 선주의 말을 따라 결정을 내린다. 그 이유는 백부장이 바울보다 바다와 배의 전문가인 선장의 말을 들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상황을 바라보는 인간의 입장에서는 그 동안의 경험과 지식을 의존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믿는 자는 오직 바울 외에는 없었다. 이는 결국 예언이 현실로 나타나게 되고 사람들이 바울을 주목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임박한 겨울에도 불구하고 남풍이 순하게 불어 순조로운 항해가 시작되었다. 이 배는 곡식을 가득 실은 이집트에서 로마까지 곡물을 운반하는 배로 추정되기에 제법 컸을 것이다. 커다란 배가 순조로운 항해를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유라굴로라고 하는 광풍이 크게 일어났다. 배의 크기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어마어마한 파도와 광풍으로 위기 가운데 처하고, 선원들은 배 곁이나 뒤에 매달던 거루라고 하는 작은 거룻배 형태의 구조선을 간신히 끌어 올렸다.
그리고 풍랑에 깨져 버릴 것 같은 배를 밧줄로 감고, 쉬르틴이라고 하는 모래언덕에 걸려 좌초되는 것을 막기 위해 연장을 내리고 바람에 밀려 다녔다. 하지만 그 다음날이 되어도 풍랑은 잠잠해 지지 않아, 사공들은 이제 배의 짐을 바다에 던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인, 사흘째 되는 날에 배의 기구까지 그들의 손으로 내버리기까지 했다. 그래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더욱 악화되어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않고 큰 풍랑도 여전해, 구원의 남은 소망마저 없어져 기진맥진한 상황이 되었다. 여러 날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못할 뿐 아니라, 풍랑에 따라 이리 저리 구르며 탈진하였기에 이제 아마 배에 탄 어느 누구도 살아 돌아갈 것이라는 기대조차 하지 못할 정도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때 바울이 사람들 가운데에 일어났다. 광풍 가운데, 한치 앞도 볼 수 없어 두려움과 불안 속에 사로잡혀 소망조차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바울은 안심과 소망의 말을 전했다. 바울은 이미 예언을 하고 백부장에게 말을 한 터라 백부장을 비롯한 사람들이 바울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 그 풍랑 속에서도 자신과 함께 계시며 자신의 삶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통해 그들에게 위로와 믿음과 평안을 회복한 것이다.
사도행전 27장 23-26절『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그런즉 우리가 반드시 한 섬에 걸리리라 하더라』
바울이 유라굴라라고 하는 광풍이 부는 배에서 한 말이다. 바울은 여러 날 동안 풍랑이 계속치고, 먹지도 못하고, 구원의 여망이 없어진 사람들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면서, 천사가 나타나서 한 말을 전하면서『배의 손상 외에는 아무도 다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라도 천사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고대시대는 대부분 천사에 대해서 믿고 있었다.
바울은 로마로 호송되고 있었다. 바울이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은 자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 것을 믿는다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믿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 음성을 직접 듣고 믿는 것과 성경에 기록된 것을 간접적으로 믿는 것은 차이가 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자였다. 믿음은 자기 자신이 글로서 된 것을 믿는가 아니면 하늘로부터 오는 음성으로 믿음으로 믿는가는 차이가 있다. 자기 자신이 믿는 믿음은 어떤 상황이 오면 사라질 수 있지만, 하늘로부터 오는 믿음은 변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성도들은 심령 속에 새 성전이 세워지고, 그 성전에 그리스도가 재림해 들어가셔서 임재하므로, 성도와 대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 구약에서 제사장이 성소에 들어가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는 것을 연상하면 되는 것이다. 구약의 성소가 신약에 와서 성도의 심령 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돌 성전을 파괴되고, 영원한 성소가 심령 속에 세워진 것이다. 이것을 천국이라고 하며, 하나님의 형상이 성도의 심령 속에서 회복되는 것이며, 에덴의 회복이 된다.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함께 부활한 것을 믿을 때, 하나님이 성령을 보내주셔서, 새성전을 세워주시는 것이다.
야고보서 5장 7절『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파루시안 παρουσίαν) 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강림으로 번역된 파루시안은 파라(옆에서)와 루시안(존재하다, 있다)의 합성어로서, 성도의 심령 속에 호 로고스가 들어오는 것을 의미한다. 호 로고스가 들어오는 것을 이른 비와 늦은 비로 비유하며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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