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부장이 바울을 구원하려 하여 그들의 뜻을 막고
백부장이 바울을 구원하려 하여 그들의 뜻을 막고
사도행전 27장 43-44절『백부장이 바울을 구원하려 하여 그들의 뜻을 막고 헤엄칠 줄 아는 사람들을 명하여 물에 뛰어내려 먼저 육지에 나가게 하고 그 남은 사람들은 널조각 혹은 배 물건에 의지하여 나가게 하니 마침내 사람들이 다 상륙하여 구조되니라』
열 나흘째 되는 밤이다. 순하게 불던 남풍을 맞으며 출발했을 때만해도 좋았는데,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크게 일었다. 나아가지도 돌아가지도 못한 채 이리저리 휘둘렸다. 배에 탄 모든 이의 꿈이 흔들렸고, 생명의 존엄은 광풍 앞에서 비틀거렸다. 항해를 시작한지 이튿날 사공들이 짐을 바다에 풀어 버렸고, 사흘째 되는 날 배의 기구를 자신들의 손으로 내버렸다. 예측할 수 없는 세상의 바람 속에서 사람의 능력과 희망이란 하루도 견딜 수 없음을 보여준 것이다.
자정쯤 되었을 때, 파도의 철썩임 소리가 조금씩 달라졌다. 사공들은 육지에 가까워진 것은 아닌지 생각했다. 물을 재어 보니 36미터였고, 조금 지나 다시 살피니 27미터였다. 수심이 얕아지는 것은 좋은 소식이지만,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자정이었기 때문이다. 수심이 얕아지며 배가 암초에 걸려 침몰할 수도 있었다. 사공들은 급한 물살에 이끌리다 암초에 부딪쳐 침몰하지 않도록 후미에 닻 네 개를 내려 중심을 뒤로 향하게 했다.
그리고 배가 천천히 해변으로 향하길 바라며 선두의 상황을 살폈다. 자정 즈음부터 동이 트는 몇 시간은 열나흘 동안 함께 죽을 고비를 넘겼던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균열시켰다. 누구보다 배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사공들이 도망을 치려고 작은 배를 바다에 내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을 지켜야 했던 군인들은 죄수가 도망칠까봐 죽여 버리자고 했다.
암초에 배가 반파될 확률이 높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 무서웠고, 죄수들이 도망친다면 자신들의 목숨으로 갚아야 했기에 죽이려 한 것이다. 그런데 그 속에 바울이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생명까지 버렸다 고백했던 그에게 더 이상 버릴 것은 없었다. 배 안에 있던 모두가 상실의 아픔에 지쳐 쓰러졌음에도 그는 아직도 배 너머 로마를 향해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선두에서 닻을 내리는 척하며 거룻배를 내리던 사공들을 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상황 너머의 소명을 붙잡고 있기 때문이었다.
바울에게 열나흘은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자로써 무죄하다는 것을 검증하는 시간이었고,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결국은 로마에 가게 될 것이란 확신을 되새김질하는, 하나님과 독대하는 자리였다. 바울은 백부장 율리오와 군인들에게 사공들을 붙잡아야만 모두 살 수 있다고 외쳤다. 그래서 군인들이 마지막 남은 희망일 수도 있는 거룻배 줄을 끊어 떼어 버렸다.
백부장이 바울을 구원하려 하는 의미는 일단 그를 로마에까지 호송하는 책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며, 나아가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들의 뜻은 죄수들을 다 죽이자는 생각이었지만, 백부장은 그것을 막았다. 백부장은 순간 하나님을 생각했을 것이다.
죽고 사는 것은 하나님의 때에 달려있다. 전도서 3장 1-2절『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를 로마황제 가이샤 앞에 서기를 원했으므로, 죽을 수 없는 것이다. 바울의 육체(body)는 살아있지만, 육신(fresh)은 이미 예수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자였다. 육체는 오직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사는 것이다. Body와 fresh의 차이를 잘 알아야 한다.
빌립보서 1장 20-24절『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그러나 만일 육신(fresh)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fresh)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Fresh는 헬라어로 사르키(σαρκὶ)이다. 육신으로(ἐν τῇ σαρκὶ)는 육신 안에서라는 의미이다. 사르키(기본형은 사륵스)는 영어로 fresh(육신)로 번역되었으나, 신을 의지하는 마음 등으로 사용된다. 로마서 6장 19절에서『너희 육신(사르코스)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사도행전 17장 22절『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데이시다이모내스테루스)이 많도다』여기에서 종교심으로 번역되었지만, 미신적인 것을 의미한다.
육의 마음으로 신을 찾는 사륵스는 육적인 욕망을 얻고, 불안을 해소하는 차원에서의 사륵스이지만, 영적 사륵스는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된다. 사륵스는 육적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은 예수와 함께 죽었고, 영적 사륵스를 의미할 때는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으로 행할 때는 사륵스가 되지만, 데이시다이모내스테루스는 그리스도가 아닌 자기가 믿는 신을 의지할 때, 사용되는 것이다.
로마서 6장 6절에서『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소마 하마르티아스)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소마는 body(몸)이다. 영이 육의 몸에 갇히면 죽는 것이고, 영의 몸에 있으면 사는 것이다. 육이 생명을 가지고 있을 때, 육으로부터 비롯된 종교심이 생기고 이게 육신(사륵스)이 되는데, 육도 부모로부터 받은 몸이 있으며, 하늘로부터 받은 영의 몸도 있는 것이다.
사륵스는 프쉬케와는 차이가 있다. 사륵스는 신을 찾는 마음으로서 육신이지만, 프쉬케는 육적 생명으로서 나타나는 마음이 된다. 개역개정에서는 프쉬케를 마음, 목숨, 생명, 영혼, 혼 등으로 번역을 했으므로 혼란스럽다. 신도들은 프쉬케를 혼으로 생각하고, 하나님이 사람을 청조하실 때, 영과 흙으로 결합하여 창조하셨으며, 이 때 혼이 생겼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혼은 마치 혼령 등으로 생각하기 쉬운 잘못된 것이다.
성도는 예수와 함께, 죄의 몸(body)에 대해서 죽었다. 그래서 육체로부터 나타나는 사륵스도 죽고, 영의 몸으로 태어나 새로운 사륵스를 가지며, 프쉬케도 한정된 생명으로서 프쉬케는 사라지고, 영원한 생명인 프쉬케가 나타나는 것이다. 비록 성도가 육체가 있지만, 이 육체는 씨의 껍질과 같은 것으로서, 언젠가 허물을 벗듯이 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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