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고린도전서 4장 9-10절『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엔 크리스투)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


바울은 자기가 받은 고난에 대해서 그들에게 설명하고 있다. 사람들이 보기에 비천하게 되고, 죽기로 작정된 것같이 보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된 것은 그리스도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이 고린도교회 지도자들에게 너희들은 그리스도로 인해서 지혜롭게 되었는데, 바울 자신이나 교회의 일반 성도들을 어리섞은 자로 바라보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는 약하나 앞에 엔 크리스투(ἐν Χριστῷ·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단어가 번역되지 않았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약하나 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비천한 것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천한 것을 의미한다. 디아 크리스투가 번역되지 않았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θέατρον ἐγενήθημεν τῷ κόσμῳ καὶ ἀγγέλοις καὶ ἀνθρώποις 」이 말은 “우리는 세상과 천사들과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라는 말이다. 우리 라는 사람들은 바울의 일행이다. 천사와 사람들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복음을 전하는 자들과 듣는 자들을 의미한다.


바울이 자기가 사역을 하면서 당한 어려움을 설명하면서, 대비하여 고린도교회 지도자들이 상대를 바라볼 때, 자기들은 대단하고, 상대는 비천하게 바라보지 말고, 동등하게 그리스도 안에서 바라보아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역자들이나, 성도들이 다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는 복음의 전파라는 같은 목적을 향해서 나가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이 고린도교회 지도자들의 교만함을 깨닫게 해주고 바로 잡아주기 위함이었다.


사도행전 4장 15-16절『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파이다고고우스)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파라카로)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기네스데)』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는 모든 것은 새로 태어나는 성도를 위함이다. 마치 부모가 태어나는 아이를 위해 온갖 헌신을 하는 그런 마음으로 행하는 것이다. 정말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사역하는 자에게 이와 같이 행할 것을 주문한다.


파이다고고우스(παιδαγωγοὺς)는 관리자, 인도자를 의미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인도자는 많지만, 아버지는 많지 않다는 것이다. 자신은 인도자가 아니라, 아버지와 같은 마음이라고 한다. 아버지라는 말을 사용한 이유는 성도란 새로 태어나는 존재라는 것을 말해주려는 것이다.


파라카로(Παρακαλῶ)는 소환하다 라는 의미이고, 기네스데(γίνεσθε)는 태어나다, 생겨나다 라는 의미다. 내가 너를 불러내니 너는 나를 본받아 새롭게 태어나라는 것이다. 교회 공동체에서 바울을 본받는 것은 신도를 새롭게 태어난 자로 대하라는 것이다. 이전에는 세상에 몰두하며 살았는데, 오직 복음을 전하는 자로 태어나는 자가 되도록 하라는 것이다. 삶의 목표나 비전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데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말을 하면서도, 세상에 마음을 돌리고 있다면, 복음에 전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를 고린도교회에 보내어서 자신의 사역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었다.


고린도전서 4장 18-21절『어떤 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 같이 스스로 교만하여졌으나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들의 말(톤 로곤)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으니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


어떤 이들은 바울이 그들에게 나가지 않는다고 교만하게 말을 하지만, 바울이 고린도교회 지도자들이 무엇을 행하고 있는지 확인하겠다는 것이다. 톤 로곤(τὸν λόγον)은 호 로고스의 말씀을 의미한다. 교만한 자들이 호 로고스의 말씀에 의지하지 않고, 오직 은사만을 의지하여 말씀을 전하고 사역한다는 것이다. 바울이 그들에게 가서 그들이 행하는 능력을 확인하겠다는 것이다. 그들이 하는 말과 은사는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오직 호 로고스를 의지할 때 그로부터 능력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되는 것이다. 은사를 나타내는 모든 표적은 이와 같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연관되지 않으면, 헛된 은사에 불과한 것이다. 비록 이 복음을 전하므로서 조롱과 비난을 받을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이 복음을 전함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복음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복음을 전하는 자는 어떤 모양으로 한다고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전하는 것을 알지 못하면, 결국 자기의 지식에 의지해서 전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호 로고스는 심령 속에서 미세한 음성으로 말씀하신다.


베드로후서 1장 19-20절「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오늘날 대부분 교회 공동체에서, 말씀을 전하는 사역자나 듣는 자나 초대교회 당시의 바울의 가르침과 같은 마음으로 말하고 듣는 자가 얼마나 있겠는가? 대부분 세상의 교리에 물들어 있으며, 세상을 향한 마음을 버리지 않으며, 마치 세상을 위하여 신앙을 이용하는 것과 같은 위험한 수준에 이르게 된 것이다.


율법주의와 기복신앙과 신비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에 진리를 찾아보기는 정말 힘들게 된 것이다. 신앙에 있어서 자기 만족이 더 중요하고, 성경 속의 진리를 깨닫기 위해 시간을 투자하는 신도들은 적은 수에 불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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